도서출판 에이엔씨 | 2005
FORWARD
디자이너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구현해 가는 과정에서 탄생되는 스케치나 메모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적인 기록들이다. 기록하는 방법도 저마다 다르고,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 또한 개인적 특성에 따라 차이를 가진다.
'작품 탄생의 단서로서의 메모', '클라이언트와 주고받는 의견 속에서 발생하는 메모', '디테일 등 작업과정에서 메모', '현장에서 주고받는 메모' 등등. 그것들은 건축가 또는 건축물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지만 시간과 함께 대부분 소실되는 정보들이기에 가까운 지인이 아니고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비형식적이고 비공식적인 기록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4권의 시리즈로 구성된 SKETCH+NOTE의 기획 의도는 '창조에서 실현'이라는 과정 곳곳에서 발생하는 미공개 메모들을 수집하고 공개함으로써, 이해의 핵심이 되는 '단서'와 '비공식적 기록'이라는 간극을 좁혀 건축가의 '영감', '방법', '도구', '사유'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데에 있다.
본서는 20-30대 중심의 젊은 한국 건축인들이 그들의 작업 과정에서 기록한 스케치와 메모로 구성되어 있다. 국내외 주요 건축 관련 공모전 수상자들, 그리고 한창 활동 중인 국내외 건축계 실무자들 100인의 작업과정이 담긴 노트를 통해 변화하는 건축의 사고와 표현 방법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 10년의 사유와 4년의 메모<?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언제부터 메모가 시작되었는지 생각한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새로운 문화나 앞선 이들의 생각을 접할 때 잊지 않도록 적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그들에게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함이기도 하다.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메모 수첩을 정하고 작정하고 메모를 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인 것 같다. 오랫동안 다녔던 설계사무실 생활을 마감할 즈음, 지금까지 해왔던 생각은 무엇이고, 앞으로의 계획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 고민하면서 메모는 시작되었다. 걸작을 만든 영화감독의 생각을 되뇌기 위한 기록이기도 하고, 과거, 특히 100년 전 건축의 모티브를 현대에도 적용할 수 있었으면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현재는 언제나 modern해야 하지 않을까.
사무실 이름도 메모에서 비롯되었다. 모도modo는 라틴어로 now, just now, only라는 뜻으로, ‘바로 지금 이 시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대를 반영하는 건축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을 갖게 되고, 나아가 미래에도 현재의 의미로 유효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190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이어졌던 건축가들의 집합주택 설계에서의 다양한 시도는 오늘날 아파트라는 주거문화를 보면서 현실을 반성하게 하며, 다양한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집합주택 설계를 위한 사례가 된다. 개발 논리에 의해 지어져 온 아파트 단지가 과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지 의심하게 하며, 언젠가 설계하게 될 집합주택의 아이디어 뱅크가 될 것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2분의 1>을 보면서 깊어졌다. 영화감독 귀도는 꿈속에서는 만인을 호령하는 폭군이지만, 현실에서는 제작자에 시달리고 인터뷰 도중 책상 밑으로 숨어버리는 나약한 인간이다. 우주여행에 관한 장대한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지만 제작비에 허덕이고 만들어 놓은 세트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다. 막연하게 영화와 건축의 공통점을 인식하고 있다가,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현실 속에서 즐기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영화의 메시지는 어떻게 건축을 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하게한다. 현실에 발을 딛고 나서야 건축가의 의도가 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로 이어진 영화보기에 관한 기록, 고전영화에서는 과거의 사회환경과 현대인의 삶을 반추하게 되며, 현대영화에서는 지금의 도시와 인간에 대한 사유를 하게 된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메모하는 습관은 기억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기의 개념을 끝까지 가져가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작업을 진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조금씩 수정을 하게 되면서 초기의 생각이 흐지부지 되고 그저 기능에만 충실한 설계에 다다를 수도 있다. 건축가의 의도가 막연한 자기고집이 아닌, 설득력 있는 개념이 되기 위해서는 초기의 이미지를 끝까지 가져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광명문화원(2003)>의 경우, 지하1층 지상2층의 공간을 근린공원의 완만한 언덕 자락에 앉히기 위해 지형과 만나는 수평의 켜를 이미지로 잡고 다양한 공간 경험을 유도하도록 설계하였다. <상록어린이도서관(2004)>은 경사가 급한 대지에 지하1층, 지상3층의 건물을 배치하기 위해 ‘길’의 개념을 도입했다. 어린이에게 길은 놀이터이며, 길은 바람이 통하고 햇빛이 비추는 아늑한 공간이 되어 내외부의 다양한 장소와 만나면서 도시와 자연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외피의 화려함보다는 공간의 풍부함을 먼저 고려하게 된 것은 ‘Raumplan’을 주장한 Adolf Loos 나 ‘space architecture’를 지향한 R.M.Schindler의 선례를 기록한 메모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