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을 위한 기억의 문화사
전진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
근래 들어 한국 사회에세 '기억'이 화두가 되고 있다.
특히 근자에 민감해진 '과거청산' 문제를 언급하는 데 '기억'의 수사는 마치 정치구호처럼 남발되고 있다.
기억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특정한 함의를 갖는다.
그것은 공식적 차원의 '역사'에 대한 저항감을 나타낸다.
역사가 권력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라면 기억은 억압되고 잊혀진 진실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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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억의 문제는 정치적 수사에 머물기에는 너무도 근본적인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쉽게 지나칠 문제가 아니다.
역사라는 철골 구조로 이루어진 근대성(modernity)의 강고한 마천루는 이를 통해 심한 타격을 입고 있다.
1950년대에 철학자 야스퍼스는 현대인이 뿌리 뽑힌 존재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인간 군상들은 자신의 기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모두 잃어버리고 오직 현재의 삶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는 더이상 우리 존재의 보편적 규준이 되지 못하고 오직 개별자나 특정 집단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골동품적인 대상으로 격하된다.
이러한 척박한 현실 속에서 역사가 현실적 효용을 찾은 유일한 영역은 대중들의 여가생활이다.
이른바 '문화재산업'이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 버려진 옛 궁터나 귀족의 영지, 마을, 각종의 폐허가
원래의 역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오직 상업적인 관점에서 단장되고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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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포화 상태의 '현재'에는 문예이론가 벤야민이 동경했던,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의 영적 충만함이 없다.
그 시간을 창조적으로 영위하는 '(역사적) 주체'도 없다.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무한대의 정보와 영상 이미지의
연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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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역사가 '사실 그 자체'를 지칭한다기보다 나름의 내러티브 구성을 통해 과거를 재현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특정한 문화라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