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산문 | 2021
문학동네
작가 정지돈을 처음 알게된 건 2016년 씨네21 1033호를 통해서였다.
<건축과 혁명>으로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이력으로 인터뷰가 실린 것.
건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과 혁명'이라는 글과 같은 제목의 소설이라니,
관심을 갖게 되고 책을 구입하여 읽는다.
인터뷰 내용 중 작가 자신을 후장사실주의라 칭한다는 내용이
그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작가의 소설과 산문을 여러차례 접하고보니 그 의미가 와닿는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속에도 후장사실주의에 대한 뒷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문학계 인사들의 모임 자리에서 선배 문학인으로부터 처음 들은 이 ..주의를 상당히 불쾌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지금은 그 주의를 받아들이고 주변의 문학인들과 하나의 그룹이 형성되어 있는 듯하다.
아마도 19세기말 인상파라는 단어가 탄생한 배경과 유사한 반전이 아닐런지.
문학동네 북클럽 뭉클에 가입한지 벌서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뭉친들에게만 열린 산문집 구매의 기회가 생겨 정지돈 작가의 책을 선택한다.
그 후로 어느날 작가 레터가 우편으로 도착하고, 또 얼마 후 편잡자 레터를 받아든다.
작가의 레터에서 언급된 것처럼, '자라르타?'라고 잘못 알아들을 만큼
작가 레터는 생소한 것이었는데,
작가 레터에서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저는 서로의 소통이 이렇게 멀어졌을 때그 사이에 발생하는 공간이우리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생각을 합니다.우리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기도 하고요.서로에 대한 관용과 호기심만 있다면 이런 오해는 어쩌면 좋은 일 아닐까요....우리가 어긋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즐거울 수 있을 테니까요. 라며 자신의 산문을 즐겨주기를 희망한다.
편집자는 정지돈 작가에게 '21세기 서울을 걷는 소설가 구보씨'의 느낌으로
산문집을 내고싶다는 제안을 했고, <2020년 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한 뒤
이렇게 책으로 묶었다며 제작 스토리를 들려준다.
자신과 같이 작가의 시니컬하고 자조적인 유머 코드가 잘 맞는 독자가 많기를 바라며
책의 후기를 검색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한 서로 다른 열 개의 산책로가 있을 것,이라며
산책로의 어느 지점에서 우리 서로 스쳐지나갈지도...라는 바램으로
자신의 산책로에 몇 개의 깃발을 먼저 꽂아두었다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모티브로 만든
<건축가 김씨의 일일>을 기록하는 김씨에게는
이 산문집이 더없이 반갑다.
작가의 소설이나 산문집의 특징은 수십 가지의 인용도서들이 등장하는 것인데,
서로 다른 시대에 각자의 분야에서 적은 글들이
정지돈 작가를 거쳐 일관된 이야기로 엮여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공쿠르 형제의 일기를 언급하며,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종합할 수 없이들쑥날쑥하는 일련의 경험과 생각들이 오가는 것,이론화하거나 미학적으로 다듬을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의 배아가 보이지만모든 것이 시간이나 생각의 흐름에서 휩쓸려 지나가버리고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산더미 같은 짐,일종의 텍스트 더미만 남는 것.그러나 여기에 일관성이 아주 없진 않다....존재했던 건 걸음을 걸었던 사람들이며나머지는 모두 구성된 것들이다.(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p.82)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은 이러한 종류의 것들이라고 소개한다.
조선시대 한양의 번화가인 건평방 부지인 공평동에20세기 중반 국가자본으로 설립되어 2000년에 민영화된 철강 회사의 자회사인 포스코건설이 시공하고1983년 한국의 1세대 건축가 원정수와 지순 부부가 설립한 간삼건축에서 설계해서19세기 런던에서 설립되어 한국에 지부를 두고 있는 부동산 자문 회사가 매각을 주관하고뉴욕에 기반을 둔 부동산 리서치 기업이아시아 4위 규모의 거래로 평가한 프라임급 상업 오피스 빌딩의 지하에롯데GRS가 유치한 요식업장중 하나인 떡볶이집(빌라드 스파이시)에서검은색 롱패딩을 입은 삼십대 아시아인 남성 문학인 세 명이라면 사리를 추가한 즉석떡볶이를 먹기 위해 앉아 있다.(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p.40)
김씨가 이 산문집을 읽으며 크게 웃은 여러 개의 단락 중 한 구절이다.
한양의 번화가인 건평방에서
현대의 번화가인 종로로 바뀐 그 지역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문학인.
이 두 장소의 사이 글 혹은 개발 과정은 어마어마하게 거창하게 보이지만
실은 일상의 한 장소일 뿐이라는 것.
벤야민에게 중요한 건 거창한 게 아니라 하찮은 것이다.마천루나 기념비가 아니라 아케이드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일상적인 사물들, 그런 면에서 보면 발터 벤야민과 로버트 벤투리는 정반대의 인물 같지만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생각보다 겹친다는 점이다.로버트 벤투리에게 중요한 것은 버내큘러vernacular한 경관이었다.그는 모더니스트인 르 코르뷔지에처럼 위대한 건축물에 집착하지 않았다.오히려 팝적이고 유치한 간판, 폰트, 이미지에 매혹됐다.(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p.161)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으로 유명한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에 대해
건축가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 작가라니.
47페이지에서 언급하는 몰mall의 개념과 그런 몰을 최초로 설계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빅토르 그루엔에 대한 글에서는 작가의 자료 수집과 인용에 대한 경외감마저 든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인용이다.
문학은 세계의 인용이다....
후장사실주의는 문학의 인용이다.
그러므로 후장사실주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다.
(씨네21 NO.1033 p.68)
이제 온전히 작가의 이 선언이 받아들여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건
김씨가 평소에 좋아하던 작가들, 보들레르와 벤야민, 폴 비릴리오 등에 대한 언급도 있지만
옆에 두고 보던 책들이 인용 도서로 등장한 때문이다. (폴 비릴리오,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작가의 책과 함께 쌓여있는 책들은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 언급된 책들로,
이 책을 보고 새로 주문한 도서들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