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자기 앞의 생 > 모도책장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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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8-03-26 17:27:37
조회: 3,481  
제목 [book] 자기 앞의 생
 

본문

 
 
 
에밀 아자르 장편소설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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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서>
 
인생에는 원래 두려움이 붙어다니게 마련이니까.
 
 
내 생각에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이
더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남의 일에 아랑곳하지 않으니까.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만 싶어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건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나에게는 꿈인 것이 아줌마에게는 악몽이 되었던 것.
로자 아줌마는 꿈이 오래되면 악몽으로 변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두 마리의 암사자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두려워할 거 없어."
그걸 말이라고 하나.
사실 말이지 '두려워할 거 없다.'라는 말처럼
얄팍한 속임수도 없다.
하밀 할아버지는
두려움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믿을 만한 동맹군이며
두려움이 없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의 오랜 경험을 믿으라고 했다.
 
 
 
 
 
어떤 곳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하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을 뿐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인정이란,
인생이라는 커다란 책 속의 쉼표에 불과하다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나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며 어느 집 대문 아래 앉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세상의 어느 것보다도 늙었으므로
걸음걸이가 너무 느렸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시간에 관해 내 생각을 굳이 말하자면 이렇다.
시간을 찾으려면 시간을 도둑맞은 쪽이 아니라
도둑질한 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고생을 많이 했노라 자부해도
사람에겐 여전히
배워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랑해야 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자신의 나이도, 엄마도 모르는 아이.
자신을 키워준 아줌마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키며.
 
누구에게나 있을 자기 앞의 생,
무엇으로 견뎌나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