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우리가 집을 짓는 10가지 이유 > 모도책장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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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2-05 22:54:41
조회: 5,301  
제목 [book] 우리가 집을 짓는 10가지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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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완 무어 지음 | 이재영 옮김
계단 | 2014
 
 
 
 
대부분의 건물은, 모두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용적인 목적으로 지어진다.
살아가는 곳이나,
물건을 만들거나 보관할 곳,
사람을 만나거나 먹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비합리적이거나 감정적으로 건물이 지어지고
건물의 형태가 결정되기도 한다.
아마 힘과 부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한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보다 미묘하고 모순적인 충동이 관여하기도 한다.
 
이 책의 첫 번째 목적은 이런 감정의 힘이 건물에 어떻게 투사되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또한 건물은 의뢰인이나 건축가, 건설회사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건물을 경험하고, 사용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건축적으로 형성된 공간을 점유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건물의 특성과 의미에 영향을 주게 된다.
 
건축물은 따라서 대개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설계한 사람과 거주하는 사람 사이에,
세대를 뛰어넘어서까지도, 서툴지만 강력한 의사소통수단이다.
...
건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어떤 것이다.
 
이 책의 두 번째 목적은,
만든 사람과 사용자의 생각과 활동 사이에 존재하는 물질적 간극이라는,
건축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
어떤 한 건물이 유한하고 완전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에도 변화는 일어난다.
 
이런 불안정성과 불완전성이라는 속성은 일시적이고 우연한 특징이 아니고,
건축이라는 것의 본질일 뿐 아니라,
건축이 가진 힘과 매력의 핵심이기도 하다.
 
<본문 중에서>




두바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텔이 있다.
7성급에, 잠수함 여행을 연상시키는 해저 레스토랑을 갖추고 있고,
꼭대기의 헬기 착륙장에서는 유명 선수들의 테니스 시합이 열리기도 했다.


사막 한가운데에 눈덮인 스키슬로프를 만들겠다는 것과 같은 터무니없음이
이 도시가 가진 힘과 매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치 도시 규모에서 펼쳐지는 텔레비젼의 리얼리티쇼 처럼.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수천 개의 발코니는 전통적인 통풍탑을 복제하여 외관을 치장한 것이다.


단지 낙관적으로 보이기 위할 뿐, 그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런 사례들을 10가지의 주제로 나누어 보여주고, 살펴주고, 드러내는 것이다.


건축과 개발의 실패작들은 종종 감정적인 선택이 실용성을 가장할 때 발생한다.
그런 상황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조금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아마도 한 두 개의 실패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이라 희망하면서.


이와 같은 사례의 대척점으로 언급되는 브라질의 건축가가 있다.
이탈리아 태생의 브라질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


지오 폰티 밑에서 일하다가 밀라노에서 자신의 사무실을 차렸으나 번성하지 못하고,
1943년 사무실이 있던 건물이 폭격으로 파괴되는 바람에 폐업.
<도무스>의 편집자로 일하기도 한다.


그녀가 브라질 상파울루에 남편과 자신을 위해 지은 집 <글라스 하우스>는
근대 건축의 세 거장의 메아리가 머물고 있다.


전면의 유리벽 박스는 루드비히 미스 반 데 로에의 판스워스 하우스를,
기둥 위에 올린 건물이라는 점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를,
건물 가운데 부분에 나무를 품는 방식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폴링 워터)을 연상시킨다.


판스워스 하우스, 빌라 사보아, 낙수장은 의뢰인의 희생을 요구했다.
이들 주택은 탕진된 예산, 소송, 비용을 댄 사람들의 환멸과 고통으로 끝나곤 했다.


보 바르디의 주택은 형식과 구조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유리로 된 전면과 벽으로 된 후면의 혼재는 미스라면 용납하지 못할 불일치이며,
예술작품의 통일성을 지상과제로 삼는 어떤 건축가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글라스 하우스는 다른 사건과 경험이 일어나게 해주는 장치다.
유리벽의 목적은 두 생명 사이의 관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외부의 동식물과 내부의 사람, 예술작품, 물체들 간의 관계다.
초목과 집의 내용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성장하고, 그에 따라 이 알뜰한 집은 풍성함으로 둘러싸이고
채워지게 된다.


집은 그대로이지만, 사람이 늙어가듯 집도 변한다.
시간의 흐름은 이 건물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는다.


보 바르디에게 변화는 예견된 것이었고 환영받는 것이었다.
그녀의 집은 늙어가면서 더 좋아진다.


이 건물의 의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덜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그 곳에서 삶이 일어난다.


세 거장의 주택은 오늘날 기념물이 되어 방문객을 맞이한다.
거주하는 집이 아닌, 보여주는 집으로 주택의 온갖 환상을 전시하는 장소가 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현란한 에세이이자 경이로운 작품들.


두바이의 건축이 배제했던 것.
장소, 물질, 사람, 성장, 날씨, 우연, 시간의 흐름을 글라스 하우스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보 바르디의 또 다른 작품, <상파울루 미술관>과 <쎄시 폼페이아>를 두고
그녀는 '가난한 건축'이라 칭한다.


상파울루 미술관은 하나의 틀이다.
삶의,
주변에 펼쳐진 도시의,
그 건물의 조경 속에 있는 식물과 물의 틀이다.
지상에서 들어올려진 70미터 길이의 텅 비어 있는 공간.
빈 공간이 채워진 공간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불변의 예술이라는 태도로 깨끗한 세부와 마감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보 바르디는 자신의 목표가 '문화적 우월의식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바르디가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행사는 공익적인 무언가로 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나치 독일에서 필요 이상으로 오랜 기간 얼쩡거린 미스 반 데 로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후원을 따내려고 애를 쓰다 실패하고, 프랑스 비시 정권의 환심을 사려했던 르 코르뷔지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찬양한 필립 존슨과는
다른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 10년에 걸쳐 만들었던 사회문화센터 <쎄시 폼페이아>를 두고
보 바르디는 이렇게 말한다.


      폼페이아 공장 레크리에이션 센터의 건축은 다른 현실을 창조하려는 욕구에서 나왔다.
      우리는 그저 작은 물건 몇 개를 거기에 살짝 갖다 놓았다.
      물 조금, 난로 하나


      사람들을 존중한다면,
      그들이 온전하게 부여받은 사회적 통합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희망에 찬 말은, 그라운드 제로를 둘러싸고 입으로만 떠들어 대던 것들보다,
훨씬 타당성 있게 실행에 옮겨졌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역사적인 비극의 장소 그라운드 제로는 수년간의 논란끝에,
결국은 임대권을 쥔 개발업자의 논리에 따라 몇 개의 유리로 만들어진 경비초소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보 바르디의 희망은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쎄시 폼페이아에 놓여진 거대한 콘크리트 타워와 같은 모든 고정된 것들도
유동성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쎄시에서 보 바르디는 규정이 없는 열린 공간들을 모아 하나의 영토를 창조했다.
거기서는 정해진 기능과 자유가 함께 공존한다.
어디서든 앉고, 읽고, 만나고, 생각하고, 아니
어떤 것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다.


쎄시는 시간이 흐르며 완성된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는 일을 통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또 현재를 넘어 미래까지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실현할 것이다.


1840년대부터 1860년대까지 만들어진 노팅힐 지구는 수백년동안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변화를 반영하며 변화해 왔다.
주택과 거리, 광장은 미리 확정된 패턴에 따라 지어졌고,
그 패턴은 시장의 선호도에 반응하며 진화했다.
이런 변화는 한 명의 천재나 위대한 건축가가 주도한 작품이 아니다.


집이라는 개념에는 하나의 기본적인 진실이 들어 있다.
바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은
우리와 무관한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공간을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없다.
우리가 그 공간에 있고,
우리가 그 공간을 만들며,
다시 그 공간이 우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는,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사례들을 돌아보면서
또 다른 브라질의 건축가, 2006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기도 한 파울로 멘지스 다 호샤의 스튜디오 풍경이 그려진다.
쓰러져가는 어느 모던한 건물의 조용한 방에는
컴퓨터는 없고, 종이, T자, 삼각자, 연필, 줄지은 갈색 파일 박스들만이 놓였있다.


건물들의 외관과 형태는 대개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이 책에 깔려 있는 믿음이다.
건축가들은 형식에서 마법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형식에만 집착하는 건축은 삶을 부정하게 된다.


건축은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만들어내고,
이 건축물은 다시 또 다른 감정과 욕망을 만드는 환경이 된다.
건축은 감정과 욕망의 덩어리에서 돌덩어리가 되고,
그리고 그 반대로도 계속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건축은 불완전하다.
오직 그 안과 주변의 삶에 의해서만 완성된다.
건축은 배경이다.

시각적 형식에 대한 집착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은 우리를 억압할 수도 있다.
미래의 모든 행동을 예측하려고 지나치게 프로그래밍을 한 건축물 역시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그린의 말처럼,
"옥스퍼드 거리에 비가 내리면,
건물은 비만큼이나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