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도 브릴렘버그
후베르트 클룸프너
어반 싱크 탱크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건축 및 도시 계획학부
사진 이반 반
옮긴이 김마림
미메시스 | 2015
삶을 바꿔라!
사회를 바꿔라!
이러한 생각들은 그에 맞는 적절한 공간을 생산해 내지 못하면
그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다.
- 앙리 르페브르
진정한 유토피아는 더 이상 해결에 관한 논쟁의 여지조차 없을 때,
말하자면 가능한 범위 안에서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따라서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충동에 의해서
전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할 때 존재하게 된다.
유토피아는 그냥 자유롭게 상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 하여금
이것이 빠져나갈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라고
상상하게 할 만큼 강제적인 것,
가장 내밀한 긴급함과 관련된 문제이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유토피아이다.
- 슬라보예 지젝
덴마크 코펜하겐의 중심부에는 자주적이며 자치적인 공동체가 있다.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라 불리우는 이곳은
1970년대 초, 비어있는 해군 기지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면서 시작되는데,
독특한 문화적 특색을 띤 집단 거주 지역으로 번성하여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유럽에서 버려진 산업 유산이나 군사 시설이 재활용의 근거지가 되는 것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발전소가 문화시설로 탈바꿈하고,
가스저장고가 집합주택으로 변신하는 곳이기도 하니.
남미의 '작은 베네치아',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 중심부에는 <다비드의 탑>이라는 의미의 토레 다비드가 우뚝 서 있다.
유럽의 사례와 같이 산업 유산으로 버려진 건물이 아닌,
부와 명성을 극도로 나타내기 위해 개발된 45층짜리 복합 건물이
무허가 거주지로 사용되고 있다.
어반 싱크 탱크와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가 수년간 함께 연구한 자료로 만들어진 이 책에서,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수직형 무허가 거주 공동체, 토레 다비드는 과연 무엇이며,
지금의 우리에게, 미래의 인류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넓고 큰 건물임에도 무단 점유지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지,
지면과 동떨어진 고층의 거주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와 달리 이 공동체가 지속되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토레 다비드가 무계획적인 도시의 축소판이라면,
건축가와 도시계획가는 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이것이 향하는 결말은 과연 무엇인를
베네수엘라의 과거와
토레 다비드의 현재,
이 건물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각각의 장으로 구성하여 풍부한 사진과 다이어그램, 도면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과거, 베네수엘라는
1914년 상업적 유정을 처음 시추한 이후
1980년에는 정부 세입의 70%를 석유 수출로 채우기도 하는데, 1960년에 설립된 석유 수출국 기구 OPEC의 창립 국가이다.
수십년간 세계는 석유에 의존하여 성장해왔고
그 수입이 넘쳐나는 베네수엘라는 재정을 부족함없이
(책속의 표현대로, 흥청망청) 소비한다.
세계 경제 구조가 변하면서 이 나라에 위기가 찾아오고,
블랙프라이데이라 이름붙여진 1983년 2월 18일.
볼리바르의 통화 가치가 두 번에 걸쳐 평가 절하되면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국가적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여러 명의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화려한 시절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희망을 가진 낙천주의자는 있어,
호르헤 다비드 브릴렘버그 오르테가는
남미에서 가장 높은 초고층 복합 단지를 계획하는데
<센트로 피난시에로 콘피난사스> (현재의 토레 다비드)가 그것.
1990년 1월 공사가 시작되어 1994년 7월 완공을 앞두고,
45층짜리 건물의 골조가 90% 완성될 무렵인 1993년 4월,
다비드 브릴렘버그가 세상을 떠난다.
건설을 지속할 리더십이나 자금이 없어지니
곧바로 건설이 중단되고, 이후 12년간 콘크리트 구조체만 덩그러니
도시 중심부에 놓여지게 된 것.
베네수엘라의 호황과 불황을 상징하는 듯이
암울하게 침묵을 지키며 서 있던 이 건물에,
2007년 9월 17일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어느 날 밤,
불법 거주지에서 쫓겨난 한 무리의 가족들이 무단 점유를 시작한다.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가
무단 점유 가족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현재(2011년) 28층까지 점유하고 있는 가구 수는 750여 가정, 약 3천명에 이른다.
난간도 엘리베이터도 없고,
물과 전기도 공급되지 않는 뼈대만 있는 건물에.
거주자들은 2009년에는 <베네수엘라의 추장>이라는 이름의 협동조합을 만들어
'품격 있는 주택, 유치원, 보육원, 주차 공간 시설 및 다목적 공간을 포함하는
도심 환경 기반 시설의 건설을 촉진시킨다.'
는 목적과 임무를 가지고 정식 조합으로 자격을 얻는다.
거주 상태가 갖고 있는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토레 다비드는 그들의 집으로, 공동체의 공간으로
그리고 삶을 사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변해간다.
외부에서 바라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지 즉흥적으로 갖다 붙인 조야한 누더기에 불과하게 느껴지고,
카라카스의 오점으로 여겨지며,
폭력과 불안의 원천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이 곳이 거주자들에게는
안전한 천국이자 자신감의 원천이자, 집(과 같은 곳)이다.
연구를 위해 그들의 편이라고 주장하며 접근하는
이 책의 저자들 또한 거주자들에게는
이방인이다.
여전히 그들에게 우리는 '그들'이고 그들만이 '우리'였다.
복합 상업시설로 계획된 건물을 집으로 사용하게 되니
토레 다비드는 언제나 진행 중인 작업이다. 끝나지 않는 영화처럼.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그때 필요에 의해 용도를 혼합한다.
스스로를 위해 디자인하고 지은 '아파트'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리적 구조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콘크리트 구조체 뿐인데,
이마저도 필요에 따라 변형이 이루어진다.
거주 가능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줄을 설치해서 이불이나 빨래를 널어 놓고,
상자를 쌓아 올리기도 하며,
찬장이나 캐비닛과 같은 가구로 벽을 삼는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유일한 이동 수단인 계단은
그 덕분에 오히려 거주민간의 소통의 장소가 된다.
같은 목적을 공유하고 지속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모습에서
공동체의 본성이 엿보인다.
토레 다비드의 거주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안에서 삶을 개선하고 싶게 하는 자극을 끊임없이 받는다.
계속 변화하는 현재에 적응하면서 끊임없이 디자인을 발달시킨다.
'디자인의 원리'나 심미론 따위에,
혹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혜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을 만들거나
그들의 목적이나 개성에 맞는 것들을 지을 뿐이다.
순차적 개발이나 단계적 개선 같은 개념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저자들은
토레 다비드의 연구를 통해 건축가들이 이제 탄력성, 적응성 그리고 변형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미래의 건축에 대한 관점은 지속 가능성이며
이 개념이야말로 모든 것이 세워지고 성장할 수 있는
실용적이면서도 윤리적인 단 하나의 기초라고 전제한다.
토레 다비드에서의 경험으로 지속 가능성이라는 의미의 범위를
어떤 건축적 개입이든 최종 사용자가 그들 자신의 계획과 노력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운용 및 관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까지
확대해야 함을 강조한다.
다양성을 희생한다고 통합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공동의 선이 개인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라고 단언한다.
'건물을 지을 때 그 건물의 변화없는 영속성을 염두에 두라' (존 러스킨, 건축의 일곱 등불, 1849년)는
생각에서 벗어나
결과와 과정이 열려 있는 개발로 도시와 건축을 대할 때
미래는 지속가능할 것이라고.
공사가 중단된 뒤 그대로 남겨진 모습
인구의 약 60%가 바리오에 거주하는 도시, 카라카스
만화로 재구성한 <그래픽노블 토레> 안드레 기타가와, 어반 싱크 탱크
계단 난간과 안전벽과 같은 안전 장치를 개선하기 위해 주민들이 지혜를 발휘하다.
토레 다비드(A동)와 B동, 아트리움, 주차건물과 K동으로 이루어진 단지의 모습
토레 다비드의 1~28층의 거주 현황
(왼쪽) 거주민 협동조합인 <베네수엘라의 추장>, (오른쪽)토레 다비드의 점유 상태
토레 다비드의 거주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입구 앞의 거리.
주민들 모두에게 열린 공용 공간. 누구에게나 아늑한 쉼터
지상층에 있는 농구 코트, 토레 다비드의 젋은 거주자들이 가장 많이 어울려 노는 곳.
토레 다비드 내부에 만들어진 시설들(상점,행정실,운동 관련 시설, 텍스타일 작업실, 종교 관련 시설, 쓰레기 하치장 ) 왼쪽 사진의 잡화점은 장사가 잘 된다고.
이미 천장이 있으니, 토레 다비드의 거주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별로 없다. 텐트와 이불 몇 장이면 개인 공간을 만들기에 충분하다.
헤어 살롱이나 양장점 작업실, 잡화점이나 체육실까지, 거주자들 스스로 다양한 종류의 가게와 공용 공간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