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모도책장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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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6-10-15 15:57:24
조회: 4,872  
제목 [book]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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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 김춘미 옮김
2016 | 비채
 
 
 
 
 
1987년. 일본 건축가 최초로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단게 겐조는
전후 일본의 위기 상황에서 화려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건축가이다.

도쿄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많은 인재를 교육하여
아라타 이소자키, 후미히코 마키 등의 유명 건축가의 스승이기도 한 인물.

이 건축가의 대척점에 요시무라 준조가 있다.
1960년대에 미국 굴지의 재벌 록펠러3세의 저택을 설계한 것으로
미국에서 더 유명했던 건축가인데,
이 책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의 무라이 슌스케 선생의 실제 모델인 것으로 짐작되는 인물이다.

1982년 여름. 대학교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는 사카니시는  
대학원에 진학해 계속해서 건축을 연구할 생각도 없고,
빡빡한 조직인 종합건설회사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도 떠올릴 수 없고,
더구나 포스트모던계 아틀리에가 인기이던 시절이지만 그런 디자인에 전혀 소질이 없다고 여긴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 선생에게 함께 일하고 싶다는 편지와 함께 졸업작품으로 준비중인 휠체어 생활이 가능한 소형주택 계획을 동봉한다.

수년간 신입사원을 채용하지 않던 무라이 설계사무실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오고, 선생과의 면접후에 채용이 되는 행운을 얻는다.

마침 진행되고 있던 국립현대도서관 설계경합(우리나라의 용어로는 설계공모, 설계경기 혹은 현상설계)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
몇 명의 건축가를 지명하여 참여시키는 설계경합에 함께 지명된 후나야마는 단게 겐조를 모델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도 경제 성장기의 일본을 상징하는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튀는 건축물을 설계하는 인물.

경합은 공정한 것 같지만 기실 위장에 지나지 않고, 설계자가 미리 결정돼 있는 일이 적지 않아
무라이 선생은 설계경합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과도 같았으나 도서관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는 듯,
이 프로젝트에 사무실의 사활을 걸고 있다.

도쿄에 위치한 무라이 설계사무실은 해마다 여름이면 몇 달동안 시골의 여름 별장으로 사무소 기능이 옮겨간다.
마치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애리조나주에 설립한 '탈리에신'의 소규모 버전인 듯이 보인다.

이 여름 별장에서의 최대 과제는 국립현대도서관 설계경합을 마무리하는 것.

소설에서 묘사되는 주된 장소가 바로 이 여름 별장인데, 설계사무소의 2/3 인원인 9명이 이 별장으로 옮겨가 설계 작업에 곁들여 자급자족하며 생활하게 된다.

여러 채의 단독주택 프로젝트와 함께 도서관 설계가 차곡차곡 진행되는 가운데
네 명의 직원들이 이리저리 얽혀가는 이야기가 흥미를 더한다.

23세의 사카니시, 26세의 마리코, 35세의 우치다, 아마도 사카니시와 비슷한 또래의 유키코.

조용히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신입사원 사카니시,
밝고 명랑한 사무 직원이자 무라이 선생의 조카 마리코,
부유한 집안에서 여유있게 자란데다  장난하듯 여성을 대하는 우치다,
온화하고 정확한 일처리로 신뢰를 주는 유키코.

이 젊은이들이 재미를 더하지만 누구보다 소설의 주인공은 무라이 슌스케이다.
70대 중반에 들어선 원로 건축가이지만 여전히 활발히 작업하고 있는 건축가.
회사원이라면 벌써 은퇴했을 나이지만,
삼십대는 초짜, 사십대가 되어도 젊은 축인 건축계에서
칠십대 현역이 드물지 않은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말수가 적고, 본업 이외의 다른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그 이름을 알 기회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사카니시는 이야기한다.
동양의 전통적 양식을 배경으로 하는 동시에 모더니즘 색채를 띤 참신한 작품을 만드는 드문 일본인 건축가로 유명한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 한국, 나아가 유럽에 가서 오래된 건축물을 찾는 한편, 철과 유리, 콘크리트가 개척한 심플하고 합리적인 모더니즘 방법론에 일찍부터 통달해 독자적 작품을 확립한 건축가.

같은 시대에 활약한 대부분의 건축가는 미래지향적 도시론이나 문화론을 웅변하면서 잇달아 공공 건축을 낙찰하지만, 선생은 설계 경합을 전제하는 공공 건축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원래가 튀는 건축론을 피력하는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디어가 다루는 기회가 저절로 적어졌다고.
사카니시는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을 십 년, 이십 년 뒤에 직접 보고 돌아다니면서 선생이 묵묵히 계속해온 일의 비범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고 하는데, 고도경제성장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안이한 자기과시욕에 구애되지 않고, 실질적이면서도 시대에 좌우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러면서도 사용하기 편리한 건물을 선생은 하나하나 만들어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눈여겨 보게 되는 대목은 무라이 슌스케의 건축관이다.

 
"기본 설계에서 조금이라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남으면,
설계 단계에서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니까
정말 이해할 때까지
정성을 다해서
설명하는 게 좋아."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거지."



관념적인 말, 추상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으면서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자 노력하고,
고객을 전문용어로 얼떨떨하게 만드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는 건축가.

늘 각광을 받으며, 잇달아 경합을 따내고,
누구나가 우러러볼 기념비적 건축물을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짓는 건축가 후나야마와 달리,
무라이 슌스케는 솟구치고 우뚝 선 건축을 만든 일이 없다.
기념비가 될 외관은 일부러 피하고 거리에 섞여
눈에 안띄는 형태를 만들고자 한다.

이런 선생의 건축을 우치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선생님 건축에 들어서면
아무도 큰 소리를 안 내게 되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촉감이라든가
부드럽게 들어오는 광선이라든가
늘 쓰는 사람이 한참 지나서
겨우 알아챌 수 있는 장치들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나 같으니까.
사람 목소리도 거기 맞춰 작아지지.
교회의 디테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중얼거림 같은 것인지도 몰라.
과연 몇 사람이나
그 중얼거림을 알아차릴까
하는 문제는 있겠지만.
...
이번 도서관 경합은
작은 목소리로 하다가는
질지도 몰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건축.
작품성을 우선시하다가 사용할 때의 편리성을 희생하는 건축물이 놀랄 만큼 많지만,
무라이 설계사무소는 구조도 평면도 쓰는 사람의 편의를 위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굳건한 원칙으로 설계를 진행한다.
중요한 것은 놓치기 쉬울 만큼 평범한 말로 얘기되는 법이라고.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 가는 거야."




 

"나눗셈의 나머지 같은 것이 없으면
건축은 재미가 없지.
사람을 매료시키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본래적이지 않은 부분일 경우가 많거든.
그 나눗셈의 나머지는
계산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야.
완성되고 나서 한참 지나야
알 수 있지."



항상 온화하고 부드러운 무라이 선생에게 사카니시가 혼나는 장면에서는 건축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스태킹 체어 도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죄송합니다. 이제 곧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늦잖아. 뭐가 문젠가?"

좌면과 다리 각도가 잘 안 된다고 답했다.

"그게 자네 혼자 결정할 일인가? 왜 보이고 의논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엄한 목소리였다.

"고객이 있고, 기일이 있어. 건축가의 일이란 그런 거야."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작은 목소리의 설계경합안은 결국 당선되지 못했다.
후나야마 게이이치가 설계한 국립현대도서관이 1등작이 된다.
이십여년이 훌쩍 지난 후 이 도서관을 가 본 사카니시는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설계경합안을 제출하기 전, 무라이 슌스케가 쓴 편지.


 

"일은 사무소 안에는 없고,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부디 좋은 건축 일을
계속해주길 바랍니다."





이제 50대가 된 사카니시는 유키코를 아내로 두고,
공동 대표로 설계사무실을 운영하며 건축을 하고 있다.

여름 별장은 무라이 선생이 돌아가신 후 텅 빈 채로 방치되어 오다
사카니시의 소유가 되고, 이 별장을 찾은 부부는 난롯가에 앉아 장작을 태우며
말없이 앉아 있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노란 잎에 감싸인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예전의 별장을 떠올리며.

요시무라 준조의 제자 나카무라 요시후미는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건축가로
<집을 순례하다> <집을 짓다> <다시, 집을 순례하다>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의
저자로 유명한 이.

이 소설의 작가는 나카무라 요시후미에게 자신의 집을 설계하고
이 집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