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 포르티에 지음 | 임명주 옮김
비채 | 2023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에밀리 디킨슨을,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이자 시인이라고 극찬한다. (보르헤스의 말 p.20)
에밀리 디킨슨의 생을 담은 영화
<조용한 열정>(2017, 테렌스 데이비스)은
여느 일대기와는 결이 다른, 시의 아름다움을 담은 영화로
생생하고 고통스러우면서
눈을 돌리기 힘든 마력이 있음을,
송경원 기자는 전하고 있다. (씨네21 1131호)
시 1540.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
너무나 살며시 사라져
배신 같지도 않았네 -
고요가 증류되어 떨어졌네.
오래전에 시작된 석양처럼,
아니면, 늦은 오후를
홀로 보내는 자연처럼 -
땅거미가 조금 더 일찍 내렸고 -
낯선 아침은
떠나야 하는 손님처럼
정중하지만, 애타는 마음으로
햇살을 내밀었네 -
그리하여, 새처럼,
혹은 배처럼,
우리의 여름은 그녀의 빛을
미의 세계로 도피시켰다네.
(디킨슨 시선, p.140~141)
<종이로 만든 마을>의 뒷 표지에는,
디킨슨이 생전에 발표한 시가 단 10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디킨슨 시선>의 해설에는 1775편의 시 중에서
그녀 생전에 발표된 시는 단지 일곱 편에 불과했고, 그것도
익명으로 발표되었다고 전해준다.
그만큼 그녀에 대한 정보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그나마 알려진 정보조차도 부정확하다.
생전의 모습이 사진 한 장으로 전해질 정도로,
전 생애가 온통 비밀로 가득 찼음에도
미국 시 계보에 필연적인 존재로 손꼽히는 시인.
작가 도미니크 포르티에는
디킨슨의 시대와 집과 마을, 자신의 이야기를 오가며
이 책을 풀어낸다.
작가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디킨슨이 바로 옆에 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영화와 시집 해설의 글에서 접한 그녀의 일상 생활과 기록들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느낌.
에밀리 디킨슨이 정원에서 채집한 꽃들로 만든 식물 표본집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낸 서간, 그녀의 친필 원고, 디킨슨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가구, 책, 카펫 등은 현재 하버드 대학교 휴턴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종이로 만든 마을, p.171)
책의 마지막 페이지,
에밀리 디킨슨의 사망 증명서에는 '직업'이라는 글자 옆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필체로
'집'이라고 적혀 있다,는 문장이
<조용한 열정>과 겹쳐지며 커다란 울림을 자아낸다.
디킨슨의 시를 다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