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도시예술city art이다....세계의 대도시와 함께 존재하고 꽃을 피웠다. 영화는 대도시의 발전의 모습을, 지난 세기말의 한적한 모습부터 오늘날의 초대형도시, 메가 시티의 번잡한 모습까지 목격하였고, 세계대전 동안의 도시 파괴와 마천루의 등장, 유태인 겟토와, 도시민의 빈부의 격차를 목격하였다. 영화는 20세기 도시와 인류의 거울이다."
-빔 벤더스, 일본의 강연 중에서
빔 벤더스, <베를린 천사의 시>1987
"건축은 사회적인 표현 행위이다. 만일 건축이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형태를 취하며, 다른 것이 아닌가를 알려고 한다면, 사회를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건축과 도시는 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건축의 비판적 연구는, 그 모태가 되는 사회 상황의 연구가 될 것이다."
-루이스 설리반, 1901년
"기술의 뿌리는 과거에 있다. 기술은 현재를 지배하며 미래에 미친다. 기술은 순수한 역사적 움직임이며, 더욱이 그 시대에 형태를 부여하는, 그 시대를 표현하는 거대한 움직임 중 하나가 된다."
- 미스 반 데 로에, 1950년
"한 예술가나 혹은 한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즉 자신이 태어난 시대와 공간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관념론적인 가정에 불과하다. 모든 인간, 모든 예술가들이란-동일한 시대의 예술가들의 이념적, 미학적 입장들이 아무리 다양하고 서로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도-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산물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시대를 표현해 내고 그 시대의 법칙성을 수반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이 법칙을 인식하고 싶은지 혹은 모른 체 눈감아 버리고자 하는지는 그가 시대와 시대의 법칙성을 반영한다는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19세기말 탄생한 이래 영화는 도시를 담으며 100년을 넘어 새로운 세기를 지나고 있다. 탄생 초기부터 자본의 힘에 의해, 대중의 지지 속에서 자라왔다는 영화의 특성은, 자본가 혹은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의해 시작되어 사용자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건축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영화는 대중의 인기를 누리며 그 지지 속에서 성장해 왔다면, 건축은 대중적 기반보다는 기술적 진보에 의해, 건축가의 이상에 의해 발전해 온다. 영화는 이제 불과 100년을 조금 넘긴 역사를 가졌을 뿐인데 반해, 건축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는 것을 상기하면 아이러니하다. 영화가 감독만의 소유물이 아니듯이, 건축물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시대가 녹아 있으며, 사용자의 요구가 담겨 있고, 기술이 축적되어 있다. 영화는 '도시와 인류의 거울'이라는 한 감독의 말과, '건축은 사회적 표현 행위'라는 건축가의 언명은 의미심장하다. 영화가 시대와 어떻게 얽혀 발전해 왔는지, 건축은 시대를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는지 관찰하는 데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 시대를 파악하여 보다 보편적인 건축으로 향하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영화와 건축이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나 예술 사조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과거를 돌이켜 보면 쉽게 드러난다.
1895년, 프랑스 파리의 한 지하 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영화가 최초로 공개될 때, 건축은 아직 아르 누보의 영향 속에 있었으나, 새로운 기계 시대의 미학으로 철, 유리, 콘크리트를 이용한 합리주의 건축이 태동한다. 영화와 건축에서의 이러한 발전은 기본적으로 18세기 산업혁명의 영향이 막대하다. 공업화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영화 탄생의 밑바탕이 되는 셀룰로이드 필름, 전기 조명, 영사기가 19세기 말에 발명된다. 새로운 재료인 철의 발명도 이 공업화에 기인한다.
독일 표현주의는, 나찌 시대의 독재를 상징하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20, 로베르트 비네)이나, <M>(1931,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1927, 프리츠 랑) 등의 영화 속에서 불안한 사회를 표현하는 배경으로 등장하며, 파이닝거의 판화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바우하우스 설립 초기에 영향을 미친다. 후에 바우하우스는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프리츠 랑, <메트로폴리스> 1927
Feininger, woodcut for the Bauhaus Proclamation, 1919
러시아 혁명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대 배경이 되는데,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이 대표적이다. 카시미르 말레비치, 엘 리시츠키 등의 예술가와 구성주의, 절대주의 등의 사조가 생겨난 시대도 이 즈음이다.
프랑스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1895,cinematographe)를 발명할 당시, 미국에서는 토머스 에디슨도 비슷한 시기에 키네토스코프(1891, kinetoscope)를 발명한다. 특히 초기부터 자본의 영향으로 대중적이며 오락성이 있는 극영화가 발달한다. 건축에서는 시카고파로 대표되는 마천루가 발달하며, 근대 건축의 거장이라 불리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활동한다.
프랑스, 1950년대 누벨 바그가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알랭 레네 등의 감독들에 의해 탄생할 무렵, 르 꼬르뷔제는 파리를 넘어 인도까지 전세계적으로 활동한다.
이탈리아, 2차 대전 후의 빈곤과 그로 인한 인간의 초상을 표현하는 <자전거 도둑>(1948, 비토리오 데 시카), 2차 대전 동안 나찌 점령하의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무방비 도시, 로마>(1945, 로베르토 로셀리니)등 네오 리얼리즘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파시즘의 영향으로 건축은 신고전주의 경향을 나타낸다.(이는 히틀러의 독재 시대,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후로 이탈리아 영화에서 펠리니나 안토니오니는 모더니스트 시네마의 새 장을 열며(<세계 영화 100>, 한겨레신문사, p184) 현대 도시에서 개인의 고독과 소외를 말한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정사> 1960
1970년대 이후, 독일에서 뉴저먼 시네마 운동이 부상한다. 빔 벤더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를 포함한 감독들은 가까운 과거와 당대 상황들을 탐구한다.(<영화사전>, 한나래, p68) 1966년, 로버트 벤츄리는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에서 매너리즘을 높이 평가하며 주관성이 강한 설계를 유도하고 있다.(<현대건축론>, 세진사, p346) 미스와 꼬르뷔제의 시대가 지나고 루이스 칸, 제임스 스털링, 피터 아이젠만, 마리오 보타, 한스 홀라인 등 수많은 건축가가 다양한 경향의 작품을 발표한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건축이 시대를 반영하며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 장치가 되는 것은 감독의 의도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보여진다. <8과 2분의1>(1963년, 페데리코 펠리니)을 보며 주변의 어려운 상황들로 인해 압박 받는 감독 귀도를 보며 현실적 제한 조건으로 고뇌하는 건축가를 떠올리기도 한다. 1920년대 버스터 키튼의 영화를 보며 ‘주택은 살기위한 기계”라 칭한 르 꼬르뷔제를 연상한다. 무한의 공간을 창조하고자 한 에셔의 그림들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영화가 흥미롭다면 1900년의 영화든, 2000년의 영화든 상관없다. 고전은 그 자체로 사유의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근래의 영화 속에선 고뇌하는 현대인뿐만 아니라 기술의 힘으로 구현된 찬란하거나 혹은 어두운 미래를 볼 수도 있을 테니까. 100여년 동안 대중 속에서 자라온 영화에서, 여전히 대중과는 거리가 먼 건축을 그들에게 접근시키는 키워드를 찾아내는 게임을 즐기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