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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05-15 10:00:06
조회: 3,027  
제목 [Suda:zip] 경향신문_'전문화의 야만'을 치유하는 건축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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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귀갓길, 공동체에서 공부하던 청년이 일하는 공방에 들렀다. 그 청년은 고용된 목수다. 출퇴근하는 자전거 핸들에 책 내용을 정리한 쪽지를 달고 다니며 공부를 놓지 않으려 애쓰는 청년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요즘 공부를 미뤄두고 공방에서 살다시피 한다. 단순 기능공에서 창조력을 지닌 장인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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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일이 그렇지 않으랴만 동서고금을 통해 목공만큼 인간 친화적인 일도 드물다. 목공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가구나 작품을 내 손으로 만드는 일이다. 머리를 쓰는 지식에 손발의 경험과 온몸의 힘을 조화시키며 전 과정에서 창의와 상상, 그리고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손재주가 없는 초보라도 뭔가를 창조하기 위해 나무를 매만지다 보면 어렵잖게 목공 삼매에 빠져들 수 있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목수 아닌 사람이 목공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값비싼 공구도 그렇지만 목공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는 건 더 어렵다. 찾아보면 목공교실 같은 것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 간단한 가구 하나 만드는 일회성 교습으로 끝난다. 직업 목수가 아니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들어 목공 삼매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은 불가능한가. 가능하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으면 간단해진다. 조합을 설립해 스스로 주인이 되는 공방을 만들자는 뜻도 여기에 있다. 이는 하기에 따라 취미 생활을 넘어선다. 전문 직업인의 전유물로 치부되는 일들을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로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상당수가 전문가의 영역을 건드리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건축이다. 지금까지 한 건축가가 이끌던 공부 모임엔 젊은 건축가 여럿이 선생으로 나선다. 주류 건축계에서 중요한 상까지 받은 전도유망한 건축가들이 한낱 작은 공동체가 개설한 공부 모임에 참여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건축가가 아닌 사람도 건축을 보다 체계적으로, 깊이 있게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 동의하는 것이다.

흔히 집을 짓는다고 하면 땅 매입과 인허가에서 설계와 시공 등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떠올린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10년은 늙는다며 손사래부터 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래도 건축 공부 모임에서는 건축가의 전유물처럼 돼 있는 건축을 즐겁게 공부한다. 중요한 건 집을 짓는 것에 앞서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나는 왜 집을 꿈꾸는가. 새로운 집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여기에 이르면 집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삶 전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인문학의 정수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이라고는 모르는 건축가에게 고스란히 맡겨두고 돈만 건네면 되는가. 인문학 공동체에서 건축 공부를 하는 것은 돈으로 사는 집, 건축가의 작품을 위한 건축에서 사람을 위한 건축으로의 전환을 꿈꾸는 것과 통한다. 내가 살 집을 지으면서도 전문가가 주도했던 일들에 내가 명실상부한 주인이 되자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건축의 큰 흐름을 바꾸는, 작은 움직임에 힘을 보태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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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화의 야만’이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한 말이다. 그에 따르면 전문가가 아는 것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가 전부인 데다 그 분야에서마저 제대로 아는 것은 자신이 각별히 몰두하는 좁은 영역뿐이다. 문제는 20세기 초 이후 이런 전문가들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들이 권력과 돈만 좇으며 본질적인 것에 대한 성찰은 팽개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현대 문명이 최악의 잔혹함과 공격성, 어리석음을 드러낸 것도 알고 보면 한 분야만 알고 다른 모든 것에는 무지한 전문가 탓도 크다. 서울시에서 최악으로 꼽히는 건축물들이 하나같이 최고의 전문가들이 지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전성과 지속성, 경제성에 치명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에도 한사코 핵발전소를 지으려는 이들도, 단군 이래 최악의 삽질인 4대강 사업을 주도한 이들도 모두 전문가 집단 아닌가. 위기의 순간, 수백명의 귀한 생명보다 회사의 문책에 더 관심을 쏟은 세월호 선원들도 그렇다.


 
흔히 인문학 하면 철학, 문학, 역사, 문화예술 비평과 외국어 연구 등등을 칭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인문학은 허영기 많은 이들의 장신구, 또는 상품의 콘텐츠나 치장을 위한 도구 정도로 여겨진다. 근래의 인문학 열풍도 여기서 거리가 멀지 않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인문학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학문의 갈래를 넘어 모든 주제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 방식을 지향한다. 건축도, 기술도, 과학도 철학적, 성찰적으로 공부하면 인문학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식이 폭발하는 시기, 모든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분야든 인문학적으로 접근하면 근원적인 것들에 대한 성찰은 가능하다. 공동체에서의 공부는 지나치게 권력을 가진 현대 사회의 전문가들에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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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405142126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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