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s of seeing] 조성룡, 한국 공공건축의 오래된 미래 > ways of seeing

본문 바로가기

작성일 2013-07-17 12:15:20
조회: 7,289  
제목 [ways of seeing] 조성룡, 한국 공공건축의 오래된 미래
 
첨부파일
 

본문

 
 
 
"욕심 때문에 둥둥섬 같은게 나오는 거죠"-조성룡, 한국 공공건축의 오래된 미래
건축가 이야기 2013/07/16 14:25   http://blog.hani.co.kr/bonbon/48134 ico_addcopy.gif


기자로 일하다보면, 한 취재원을 여러번 인터뷰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부분 그 분야를 대표하는,

그리고 오랜 생명력으로 이슈를 이끌어가는 이들이다.
건축을 담당하는 기자로서 인터뷰를 많이 한 분들은 여럿이다. 아마도 고 정기용 선생을 가장 많이 인터뷰하지

않았나 싶다. 기억에 남는 것만 5번 정도를 했다. 그리고 승효상 선생도 그 비슷하게 인터뷰를 했다.  


조성룡 건축가 역시 그 정도 인터뷰를 했다. 가장 최근에 한 인터뷰는 `공공건축'에 관한 것으로, 건축전문매체인

<건축신문>의 요청을 받고 한 인터뷰였다. 어느새 칠순에 접어든 노 건축가는 여전히 젊었고, 섬세했고, 또 비판적이었다.

 조근조근 다양하고 폭넓은 분야를 오가며 개념을 조직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의 말솜씨는 서로 다른 분야를 잇고

 조합하는 건축의 매력과도 상통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 일은 늘 즐거우며, 뭔가 배우게 되고, 또 한 분야를 걸어가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다.
 
이번 <건축신문>에 나온 그의 인터뷰를 옮겨 소개한다. 앞으로도 그를 계속 인터뷰할 일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며.
 
----------------------------------------------------
 
2011년 홍성에 들어선 미술공간 ‘이응노의 집’ 이후로 조성룡 성균관대 교수는 활동이 뜸한 것처럼 보였다.

간담상조했던 평생의 지기 정기용(1945~2011) 건축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상심이 어떠했을 지는 굳이

가늠할 필요조차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새로운 일을 쉬지 않고 해온 조 교수의 스타일을 생각하면 그의

에너지가 식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동시대 건축가들 중에서 조성룡 교수보다 더 유명한 이는 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꾸준하게 건축을 해온 이는 드물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건축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jsr00.jpg

▲ 건축가 조성룡. 1983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및 공원> 국제설계경기에서 1등으로 당선하면서 본격적으로

건축가의 작업을 시작했다. <광주 의재미술관>, <서울 올림픽공원 소마미술관>, 한강 <선유도공원>,

<해인사신행문화도량> 설계경기에서 1등으로 당선했으며,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국제설계경기의 파이널리스트였다.

서울시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상, 김수근문화상 등을 수상한 바 있고, 2002년에는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초청작가로,

2006년에는 같은 전시회의 한국관 커미셔너를 맡았다. 현재 도시건축집단 조성룡도시건축 대표이며,

성균관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석좌초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위상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언론을 통해 간간이 발표되는 각종 설문조사들이다. 2011년 <조선일보>가 국내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 설문에서 조 교수의 대표작 ‘한강

선유도공원'은 1위에 올랐다. 건축을 베스트나 워스트를 뽑아 순위를 매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2000년대 이후 꽃을 피운 그의 건축이 한국을 대표하는 반열에 오른 것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리고 올해 초 와 <동아일보>가 함께 발표한 ‘건축가 100인이 꼽은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 조사 결과는 조 교수의 비중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소식이었다. 최고 건축물 20개 안에 조 교수의 작품은 ‘선유도공원’(조성룡+정영선, 2002년)이

3위, 어린이대공원 ‘꿈마루’(2011년)가 14위, 의재미술관(조성룡+김종규, 2001년)이 17위에 올랐다. 3개의 작품이 한국

현대건축 베스트에 꼽힌 건축가는 그가 유일했다. 세 작품 모두 2000년대 이후의 것이란 점, 그리고 모두 공공성이 강한

건축이란 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

 


어느새 조 교수는 한국 건축계 최고 윗세대가 됐다. 1940년대 생 건축가들 중에 지금껏 일선에서 활동하는 이는 이제 그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세대 중진 건축가들 중에서 그처럼 아들뻘인 후배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며

호흡하는 이도 없다.

10년 전, 그의 회갑을 맞아 후배 22명이 글을 써 헌정한 책 <건축 사이로 넘나들다>의 서문에는 조 교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60이 된 조성룡은 여전히 호기심 어려 있고, 여전히 끊임없이 일을 벌이고 있으며, 여전히 실무

건축인의 부지런함을 그대로 안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의 손과 발로 그 무엇을 만드는 일을 즐기는 모습도 그러하다.

여전히 영화와 음악과 책과 회의와 현장을 쉴 새 없이 오간다. 여전히 어떠한 질문에도 소박한 답을 하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심지 굳다.”

 


10년이 지나 그가 칠순을 맞은 지금도 이 구절은 유효하다. 발표하는 작품 소식은 줄어든 듯해도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을 비롯한 여러 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있었고, 여러 건축계 행사장에서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칠 수 있었고,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진을 통해 자주 근황을 접할 수 있었다.


 

전화와 웹으로 안부를 전해오다가 <건축신문>의 인터뷰 원고 요청으로 조 교수의 작품인 경기도 용인 지앤아트에서

모처럼 여유롭게 그를 만났다. 조성룡 건축을 보면서 성장한 후배 건축가들이자 ‘파워 건축블로거’들이 부담 없이 만나는

자리에 끼어들어 담소와 술자리로 인터뷰를 대신했다. 6시에 시작한 모임은 밤 11시에나 끝이 났을 정도로 오래 이어졌고,

그는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게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jsr01.jpg

▲ 충남 홍성 `이응노의 집'(2011). 땅의 흐름을 최대한 살리는 자연스런 조경 위에 작게 쪼갠 집들을 올린

미술관.사진=김재경 건축사진가
 



매번 건물 하나하나가 몇 년 씩 걸리는 긴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신가요.

 


요즘 가장 중요하게 하고 있는 것은 선유도공원 리노베이션 작업, 그리고 궁리출판사의 파주 사옥 설계입니다.

선유도공원을 마친 게 벌써 11년 전입니다. 이번 리노베이션은 전시관 건물을 새롭게 고치는 것입니다. 전시관은 내부

전시와 인테리어를 제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제가 원래 생각했던 개념으로 돌리는 한편, 10년 사이에 바뀐

생각을 더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은 원래 펌프장이었던 건물인데 갤러리를 넣은 것이에요. 개념을 제가 잡았지만 10년 전 공사 과정에서 제가

의도한 것과는 달리 일반적인 전시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든 조정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해서 무척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2002년 개관 이후로도 계속 전시관에 변형이 더해져서 많이 바뀌었는데, 이번 기회에 원점으로 돌아가 정리하려고 합니다.


 

jsr02-1.jpg

▲ 조성룡의 대표작이자 한국 건축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선유도 공원'(2001). 정영선 조경가와의

공동작품. 사진=김재경 건축사진가
 



어떤 콘셉트의 전시관으로 바꿀 예정입니까.

 


원래 이곳이 산업시설이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석고보드를 다 떼어내 콘크리트를 노출시키고 배관도

 모두 드러나게 할 겁니다. 공장이었을 때의 모습과 새로 바뀐 모습이 모두 표현되도록 하려고요. 뜯어내는 과정에서 나온

 목재들은 가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재활용이란 무엇인지, 이런 건물에서 화장실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시는 벽에 패널 붙이는 것을 일체 없애고 홍보적 전시가 아닌 것으로 할 예정입니다. 영상과 인쇄 매체만으로 모든

전시를 한다는 개념입니다. 선유도 전시관 공간 자체가 전시 개념이 되는 거죠. 디자인회사인 수류산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전시관과 함께 ‘녹색 기둥의 정원’도 새로워집니다. 녹색 기둥의 정원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가 수장고 시설입니다.

그걸 재활용해서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선유도가 원래 입구는 양화대교 쪽에서

들어가는 동선이었는데, 무지개 육교인 선유교가 생기면서 그쪽이 주 출입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코스로 들어서면

물탱크 3개가 그냥 어중간하게 남아 있는 모습을 먼저 마주치게 됩니다. 이 물탱크들을 활용하는 방안, 작은 방문센터와

카페를 만드는 것, 그리고 주변의 비어있는 시설들 몇 가지를 손보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jsr02-2.jpg

▲ 선유도 공원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으로 꼽히는 `녹색 기둥의 정원'. 옛 건물의 기둥을 그대로 남겨

조형물처럼 활용했다. 사진=김재경 건축사진가.

 



올해 칠순을 맞으셨습니다. 리노베이션 작품인 어린이대공원 ‘꿈마루’에서 잔치가 열렸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선유도공원에서 하려고 했는데 리노베이션 일정이 늦어져서 5월11일에 꿈마루에서 했습니다. 참 재미있었어요.

낮 2시에 시작해서 7시까지 이어졌으니까. 제가 서울건축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성균관대에서 가르친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마련한 자리라 다른 분들은 모시지 않고 제자들하고 치렀습니다. 60이 되었을 때는 선유도 녹색 기둥의

정원에서 회갑연을 했는데, 이번에도 그 때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제가 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죠.

젊은 사람들이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워요.

 


선유도 말고 다른 작업은 어떤 것을 하고 계신가요?

 


요즘에는 리서치 작업을 많이 해요. 우리 학교 설계원이 리서치를 하니까요. 결과가 좋으려면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겠죠.

대학교수들이 많이 하는데, 보통 디자인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리서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리서치는

리서치만으로는 효과가 없다고 봅니다. 리서치와 디자인이 동시에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서소문 역사공원 리서치 작업이 있습니다. 현재 서소문 공원이 밑은 주차장이고 위가 공원인데

이곳을 역사공원을 만들기 위한 리서치예요.

원래 그 자리가 국사범을 처형하던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때는 서소문인 소의문을 나가면 바로 칠패시장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중요한 루트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처형을 했던 것이겠죠. 조선조 마지막 즈음에는 그 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많이 처형했습니다.

 


처음 중구청에서 리서치를 의뢰했을 때는 안 할까 했어요. 공원 설계에 저도 선수로 뛰고 싶은데 말이죠. 나이를

먹으면 잘 안 되니까 그거라도 하자, 그랬습니다(웃음).

그런데 이 곳이 사실 공원으로는 최악의 조건입니다. 밑은 주차장이고, 쓰레기처리장도 한편에 있고, 옆으로 경의선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의주로도 있습니다. 남대문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의주로는 사신들이 오갔던 길이었습니다.

여기에 용산과 남산 사이를 흐르던 만초천이란 물길도 연결됩니다. 두 개의 역사적인 루트가 공원 안으로 지나가는 겁니다. 그걸 밝혀내서 컴피티션에 응모하는 이들에게 이걸 살려내서 설계해야 한다는 지침을 주는 일입니다.

 


요즘에는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선유도공원과도 연결되는 것인데, 조경가 정영선 선생하고 둘이서 박원순 시장의 공원 녹지 분야 고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아니죠(웃음). 중요한 공원 현안에 대해 시장이 보기 전에 파악하고 이야기를 해주는 일입니다. 쉽지는 않아요. 워낙

엉터리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경의선 폐선 부지 문제 같은 것입니다. 개념이 부재해요. 왜 개념이 없냐 하면, 경의선 부지는 전부 아파트나 

집 샛길들인데 그걸 공원으로 꾸미는 아이디어들을 보면 너무나 건조합니다. 나무 심고 벤치 놓고 산책길과 자전거길

만드는 것들뿐입니다. 원래 다른 곳에서 실시설계했는데 잘 진척이 안 되어 미뤄지고 있다가 박 시장이 다시 리뷰해보자고

 해서 지금 다른 업체에서 검토 중입니다.

 


중요한 것은 철도 부지를 복원한다고 하면 그 역사적 맥락도 같이 봐야한다는 점입니다.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의

서울 부분을 확대한 ‘경조오부도’라는 지도를 보면, 산의 맥이 삼각산부터 시작해서 인왕산 걸쳐서 안산으로 흘러가요.

아현길로 넘어가면 용산으로 넘어가는 용 모양의 작은 능선이 있고, 지금의 효창역과 공덕역 사이가 언덕이에요.

용머리가 지나가는 부분인 그 곳에 철도를 놓았으니 땅이 파였겠죠. 그걸 마포구에선 복원을 하려 합니다. 밑으로

공항철도가 들어가 있고, 전철이 그 위로 올라가 있는데 메워서 복원한다? 불가능한 일이죠.

 

경조오부도를 보면 거기 있었던 옛길이 나옵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들을 모두 종합해서 철도만이 아니라 다른 길들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고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철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되는데, 시대별 지도 열 장만 보면 되는데 말이에요. 그런 게 아쉽습니다.

 


건축가 조성룡이라고 하면 공공건축이 떠오를 정도로 공공적인 건축에 주력 해오셨습니다. 요즘 나아지고는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국의 공공건축은 아쉽습니다. 현실적으로 건축가들에게 공공건축은 남는 것은 없고

고생만 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발주처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사무실 운영도

어려운 건축가들에게 공공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만 하기도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

 


꿈마루를 할 때 여러 곡절이 있었습니다. 원래 꿈마루는 건물을 헐고 신축하기로 되어 새 건물 설계까지 다 마친 상태에서

 나상진 건축가의 작품이란 것이 뒤늦게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축이 아니라 리노베이션으로 바뀌었는데, 서울시

입장에선 설계비를 다 지급했으니 리노베이션 설계비를 따로 책정하기 힘들었죠. 그래서 리노베이션을 하게 된 제가 받은

설계비가 2000만원이었습니다. 규정상 관에서 수의계약으로 할 수 있는 금액 한계선인데, 실제 설계에 대한 금액으로는

참으로 부족한 것이죠. 질문에서 발주처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래도

그냥 하는 겁니다. 제 답을 말하자면 ‘2000만원의 비애’라고 할까요?(웃음)

 


그럼에도 공공건축은 건축가들이 필수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 뽑은 베스트 건축 20개를 보면

공공건축이 적어요. 대부분 민간건축입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세워진 건물이 20개 중 13개인데 그 중에 공공건축이

 드문 것입니다. 제가 베스트로 많이 뽑힌 것은 공공건축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들은 결국

공공건축일테니까요.

반면 워스트 리스트를 보면 최악의 건물 20개 중에서 13개가 공공건축입니다. 서울시청, 예술의전당, 광화문광장…,

대형 프로젝트들이고 대형 사무실들이 설계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공공건축을 발주하는 관이 건물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되는데, 꼭 욕심을 부려요. 자기 임기 안에 완성해야 한다는. 그러면 둥둥섬이 되는 겁니다. 아이디어가

없는 거죠.


 

jsr03.jpg

▲ 리노베이션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서울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원래 건물을 헐고 신축할 예정이었는데,

1세대 건축가 나상진의 작품임이 밝혀지면서 옛 건물을 되살리는 고쳐짓기로 다시 태어났다.

사진=김재경 건축사진가.
 



제대로 된 공공건축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가장 큰 원인은 뭘까요?

 


공공건축이야말로 신경 써서 잘 만들어야 하거든요. 시민들의 세금으로 짓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관에서는 그렇게

 안합니다. 턴키로 하고, 입찰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전혀 없어요. 그게 지금의 서울시청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축가들이 공공건축을 하기는 사실 쉽지는 않죠. 공공건축 설계 컴피티션에 나가려면 엄청난 희생이 따르거든요.

한번 컴피티션 나갈 때마다 드는 비용들이 누적되면 엄청납니다. 컴피티션에서 떨어지면 비용을 모두 날리는 셈이죠.

저도 이응로의 집 당선되기 전까지 7번을 연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러다보니 아주 큰 컴피티션들은 큰 회사가 하고, 조그만 공공건축은 50대 중견들은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어 수지도 맞지 않고, 공무원들하고 작업하는 것도 힘듭니다. 민간 건축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나은 거죠.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우리 건축가들이 중요한 건축가들이 공공건축에 대해서 무심한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민간건축만 하다보면 건축가들은 되는 부유층의 일에 길들여지게 됩니다. 우리 사무실이야 일이 없으니까 작은

공공건축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국 2000년대 이후를 보면 큰 공공건물은 거의 다 실패했고, 민간건축쪽에선 이야기할 만한 것들이 적은 겁니다.

일단 서울시가 턴키나 입찰을 안 하겠다고 하니 제발 그렇게 되면 좋겠어요. 그러면서도 걱정은 되죠.

 


공공건축은 물론 아파트나 집단 주택 같은 공동주택 설계도 가장 많이 한 건축가로 알고 있습니다.

 


공동주택은 세어보니까 지금까지 15개를 했어요. 얼마 전에 어떤 건축 잡지 편집장이 제게 “한국 건축가들은 아파트를

잘 안 하는데 당신은 유독 아파트를 많이 했다. 공공건축도 가장 많이했는데 왜 이 두가지를 열심히 해왔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이것저것 다 하는 것이지 아파트를 하면 건축가가 아니고 미술관을 하면 건축가인 것은 말이

안 된다, 둘 다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했어요.

 


건축가는 민간건축을 설계해도 공공건축처럼 공공적인 부분을 더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어떻게 건물을

쓸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 결국 공공성이죠. 여기 지앤아트도 민간 건축이지만 이용하는 분들은 공공건축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울타리를 치지 않고 건물을 열어 길과 연결 시켰으니까요. 사실 민간 건축에서 이렇게 하기는

정말 어렵죠. 그런 디자인을 건축주가 받아줘서 고마워요.
 

지앤아트4-지앤아트 제공.jpg
▲ 조성룡 건축가가 설계한 경기도 용인 `지앤아트스페이스'. 민간건축임에도 길을 안으로 끌어들여 작은

마을처럼 공간을 연출해 공공성을 높였다. 사진=지종진.


 

이응노의 집은 작아도 의미 있는 공공건축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만,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응노의 집은 처음부터 완공될 때까지 담당 공무원 팀이 5번 바뀌었어요. 기껏 술 마셔 가며 공공건축과 건축에 대해

 설득하고 나면 다시 바뀝니다. 300평짜리로 6번을 시달린 거죠.

그리고 건물을 짓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제대로 유지되게 하려고 해도 할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전시하는 업체가 전부 고정시설로 만들어놔서 뜯고 고치지도 못해요.

 


건축계는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건축의 현실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무풍지대라고 할까? 움직이는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요. 일이 없으니까요. 90년대 한국 건축이 호황이었습니다. 그 때

건축가들에게 가장 많이 늘어난 일감이 근린생활시설이었어요. 하지만 사실 중요한 건축가라면 꼭 해야 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많으니까 계속 한 거죠. 그게 사실은 악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건축계에서 상당수가

그걸 일거리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건 사실 부담이 없이 하는 일이잖아요. 그건 잘못이거든요.

이 일감이 이젠 싹없어졌죠. 큰 회사는 아파트 일이 없어졌고. 여기에 일반인들은 집을 안 짓게 되고. 결국 남는 것은

관공서 일하고 부유층 일뿐이고. 제가 보기에는 이런 상황이 10년은 갈 것 같아요. 상당히 많은 설계사무실들이 없어지고

시장이 재편될 겁니다.

 


영국 건축가협회에서 낸 백서를 보니까 2050년 영국 건축계를 전망한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그 때가 되면 5~20명짜리

사무실은 사라진다는 겁니다. 아주 큰 사무실과 아주 작은 사무실만 남고 건축가 상당수가 큰 회사에 매니저로 들어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된 거죠. 전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시대를 대비해야 합니다. 조그만 사무실 몇 개만 있어도 된다는 겁니다. 그래도 조그만 집을 주문하는

건축주는 있다는 거예요.

 


사실 우리 건축계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습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건축 쪽에서 도시 설계도,

 조경도 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80년대~90년대 일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그런 영역들을 다 잃어버린 거예요. 건축하는

사람들은 집만 짓게 된 거죠.

 


젊은 건축가들에겐 정말 가혹한 상황입니다.

 


가끔 모임에 나가보면 40대, 50대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 30대들이죠. 제너레이션 갭이 생기는 거예요. 예전 서울건축학교

때를 생각해보면 윗세대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이 이젠 다 자리 잡았고 50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30대가 많은 거죠. 역 피라미드가 아니라 아예 와인잔처럼 중간 세대가 없는 구조예요. 어떤 사회나

피라미드 구조여야 안정이 되는데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그 윗세대들이 제대로 후배들을 보살피지 않았고, 그 결과 세대

연결이 되지 않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30대들이 정말 걱정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30대들은 아주 열심히 합니다. 혼자서, 또는 부부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이 늘어났는데 그게 오히려 좋은 샘플 같아요. 이제는 그래야 하는 거죠. 외국을 보면 이미 그렇게 되었고.

어찌 보면 우리가 그동안 좀 이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면허만 있으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었던 시대가 이어졌는데,

그 많던 일이 다 없어졌으니 멘붕 상태인거죠.

 


그래도 괜찮은 젊은 건축가들이 나와 주고 있어요. 윤동주기념관도 좋았고, 한강나들목 프로젝트도 신선했고.

바우건축이 어린이용 골판지 놀이기구 실험하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아주 소규모로 혼자서, 부부가 작업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봐요.

 


시장이 열악해진 지금이 오히려 정상일수도 있다는 말씀 같네요.

 


외국은 이미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상하게 외국의 그런 현실 타개책은 모델로 주목하지 않고

비즈니스 모델만 들여와요. 90년대 안도 다다오 등 일본의 유명 건축가 사무실을 여러 곳 둘러봤는데, 그 때 느낀 것이

그 유명한 사무실들인데도 손님이 오면 전부 직원들이 차를 내오는 겁니다. 사무나 행정을 하는 직원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는 건축가 사무실에 운전기사도 있고, 비서도 있죠. 설계사무실이 무슨 비즈니스 회사도 아닌데 말이죠.

그걸 보고 그 때부터 차를 없애고 전철 타고 다녔고, 서무 직원도 없앴어요.

 


저는 건축가란 일이 없으면 청소 하고, 일 년에 주택 하나 설계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견디게

만드는 조직으로 바꿔야죠. 우리 사무실도 직원이 지금 네 명이에요. 지금은 다 줄여서 가야 되요.

 


구본준/<한겨레> 대중문화팀장, 건축칼럼니스트.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두 남자의 집짓기> 지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