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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10-26 23: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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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ways of seeing]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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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통권 054호 | 사람과 글 人ㆍ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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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룡
건축가. 1944년 생. 인하대 건축과 및 동 대학원 석사.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의재미술관, 소마미술관, 선유도공원 등 소수 건축물을 설계했다. 서울건축학교 교장을 지냈고 지금 성균관대 명예석좌교수로 있으며, 한국 최고의 건축물 20에 가장 많은 작품이 뽑힌 건축가이기도 하다. 2회의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서울시문화상, 김수근건축상 등을 수상했다.
※ 인터뷰 및 정리: 심세중(수류산방 대표)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하여, 꿈마루 

   [2011년 5월 어린이대공원에 개관한 꿈마루(조성룡+최춘웅)는 드라마틱한 사연이 많다. 철거하려던 흉물이 아슬아슬하게 살아 남은 지 불과 2년만에 한국 최고의 현대 건축 14위(2013년, 동아일보+『공간』 조사)에 꼽혔다. 젊은 건축가나 학생들에게는 가 보아야 할 답사 코스로 자리잡아 간다. 그러나 꿈마루는 언제 찾아도 고즈넉하다. 늘 볕의 함량이 바깥보다 조금 높은 피크닉 가든에 고요가 내려앉는 사이, 맞은 편의 어둑한 테라스에는 습한 바람과 함께 새소리가 부산하다. 어린이 교양관의 시간, 골프장 클럽하우스의 시간, 그 밑바닥에 먼 조선 왕릉의 시간까지 겹쳐 있는 꿈마루의 이야기는 지난 몇 년 사이 여러 곳에서 발표되었고, 그렇게 해서 하나의 정본이 만들어져 가고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와 그 정리는 의외로 지난했다. 꿈마루의 주제는 시간이나 기억, 기념이니 보존과 같은 낱말을 넘어서, 이 도시나 복원, 공공, 문화재같은 그런 거창한 문제도 아니라, 오히려 기품 있게 늙어감에 대한 하나의 태도로서 드러나 보였다. 어떤 물질 덩어리인 건축이, 어떤 공간이, 기품 있게 늙어감을 드러낼 수 있는가. 꿈마루의 갖가지 사연과 건축적 기법은 결국 그 곳으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우리의 표정, 우리의 손짓에 대한 것이기도 하겠기에 전문가의 영역를 넘어선다. 우리가 마주친 대상의 품위 있게 늙어짐이자,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의 품위이기도 하고, 근대 건축이-도시와 산업이- 인격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의 주제이기도 할 법하다. 또한 그처럼, 시간이 흐른 뒤의 어느 가을 저녁이나 겨울 아침에 꿈마루는 또 다른 사연과 태도로 우리를 이끌 것이라고도 믿는다.]
   (사정으로 연재를 두 달 쉬게 된 점에 대해 조성룡 선생님과 웹진 민연, 독자 모두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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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초기 모형. 지금은 없지만 초기에는 지붕 위를 일부 뜯어 세모꼴로 천창을 댈 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김재경.]



   "꿈마루가 개관한 지 만 4년이 되었습니다. 서울 어린이 대공원 안에 있는데, 아직도 비교적 안 알려졌죠. 어린이 대공원이라는 곳의 성격이, 마치 어린이만 가는 공원 같단 말이에요. 어른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곳, 가더라도 애들 때문에 의무로 가는 곳. 그래도 대부분 어린이날 전후로 한두 번은 간 적이 있으니, 서울 사람이라면 상당수가 봤음직한 건물입니다. 꿈마루를 두고 어떤 사람은 재활용, 어떤 사람은 복원이라고도 얘기하는데 어느것도 꼭 맞지는 않은 듯 싶습니다. 처음으로 되돌린 건 아니니 복원은 아니고요, 그보다는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살리려 했습니다. 어떤 정치 사회적 흐름 속에서 태어난 건물이나 공간이 무슨 원인에 의해서 바뀌고, 또 쓰는 사람이 바뀌면서 자꾸만 변해 가는 과정, 그 자체를 현재에 드러낼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시대마다 남겨진 흔적도 가치가 있다면 버리지 않고, 거기에 지금 시점을 다시 삽입하는… 건축 평론하는 김원식 선생이 하신 얘기가, 이 건축은 양피지에다 새로 쓴 건데(팔림프세스트), 대개는 그러면 마지막에 쓴 것이 가장 두드러져 보이기 마련인데, 그게 아니라 새로 쓴 것과 옛 자국이 그대로 같이 보인다고요. 재미있게 읽으신 거 같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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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2층과 계단. 대공원에서 공룡 전시회를 할 때 그렸음직한 벽화가 난간에 남아 있는 이 안에, 공룡의 머나먼 후손일 작은 새들이 익숙하게 드나들며 비를 피하고 쉬기도 한다. 사진 민희기.]







서울시에서 철거하기로 했던 어떤 낡은 건물

   "2010년 봄에, 인테리어 협회에 있던 홍대 오인욱 교수라는 분이 전화가 왔어요. 서울시 디자인 무슨 위원회에 속해 있는데 회의 중에 건물 하나가 논란이 되었다, 보존하느냐, 철거하느냐. 이어서 그 일을 행정적으로 맡고 있던, 푸른도시국 최광빈 국장이 자문을 구한다며 왔습니다. 그 때 최광빈 국장은 푸른도시국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고, 부임하기 전에 이미 철거 후 새로 짓기로 방침이 결정된 상태였습니다. 어느 날 오인욱, 최광빈, 저 세 사람이 지금의 꿈마루, 즉 어린이대공원 교양관에 모여서 처음으로 현장 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그 건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어요. 외양은 많이 낡았고, 페인트를 계속 덧칠한 상태였고, 우리가 지금 보는 당당한 구조는 있었지만, 창이라곤 하나도 없이 몽땅 MDF로 덧대고 틀어막아서, 무슨 재개발 현장처럼 어수선했어요. 내부는 전등도 없어서 손전등 들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뭐야?’ 굴 속 같이 들락날락해요. 시에다 구조 진단한 내용과 원래 도면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구조적으로는, 제일 꼭대기층만 방수 성능이 조금 안 좋고 그 외에는 별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시에 설계 도면이 없다는 거예요. 부랴부랴 수소문하기 시작했다가 1968년인가, 『공간』지에 간단하게 소개한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도면을 보고 기절할 만큼 놀랬어요. 그 때 이게 나상진이라는 분의 작업이었다는 것과, 처음엔 골프장 클럽하우스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건물이 <한국 건축 100년> 전(199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당히 주목을 받은 것도요. 아 이것은, 그냥 어떤 건물이 아니라 한 시대의 선을 긋는 프로젝트다, 그런 감이 들었어요. 어려운 점이 있어도 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광빈 국장으로서는 고민인 것이, 전임자가 해 놓은 일이고, 이미 결제도 끝난 걸 다시 바꾼다는 것이 행정적으로 무척 어려우니까요. 원래 조건은 어린이 대공원의 관리 사무소 기능이었습니다. 그것으로만 쓰기에는 이 건물이 지나치게 크고, 유지 관리하는 데 돈도 많이 들어가고, 보기에 따라서는 옛날 건물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었을 수 있지요. 그래서 철거하고 작은 사무소를 새로 짓겠다고 한 것입니다. 제가 최광빈 국장에게 헐지 않고 쓸 수 있을 꾀를 낼 테니 그 방안이 납득이 가면 헐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서 시작이 된 얘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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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진, 서울 컨트리 클럽 클럽하우스 완공 직후 전경과 입면도. 1970년.]

 

 
   조선의 왕릉에서 일제의 골프장으로
   "그러니까 대공원이 골프장이었다는 거잖아요. 우선 왜 어린이 공원이 거기 들어서게 되었는가. 1973년에 개장을 했으니, 거의 5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거기가 능동이지요. 능(陵) 자는 큰 무덤이란 뜻이고요.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황태자 시절의 비라고 해야 하나요,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년)인데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죠. 지금 어린이 대공원 자리에 안장을 했다가(1904년, 유릉) 나중에 순종이 승하하면서 남양주로 옮아 갔습니다(1926년). 그 남은 땅에 일본 사람들과, 일본하고 가깝던 우리 고관들이 합의를 봐서 골프장(군자리 코스)을 만들게 됩니다. 기록에서는 영친왕(이은, 1897~1970년)이 표면에 많이 등장해요. 순종의 동생이 되죠. 아마 왕실을 설득하기 위해서 볼모로 일본에 가 있었던 영친왕을 이용하지 않았나, 그런 해석이 많습니다. 전에 내가 우리 나라 최초의 골프장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제일 처음 골프장이 들어온 건 그 전이었다고 해요. 원산 같은 데 영국 사람들이 만들었고, 지금 서울 효창공원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효창원이라고 만들었는데(1921년에 일제 철도국에서 조선호텔과 패키지 관광 상품으로 개발했다-편집자) 다음에 공원이 되었죠. 서울에 게이조(경성) 골프 구락부라고 하는 단체가 생기고, 그 구락부가 군자리 코스에 들어갑니다. 하나는 장소고 하나는 조직이죠. 2차 대전 말기가 되면 비행장 활주로로 쓰이나 봐요. 전쟁으로 잠시 쉰 때를 제외하면 해방 후 서울 골프장으로 이름이 바뀌어 1929년부터 1970년 무렵까지 계속해서 골프장으로 쓰인 곳입니다."



[군자리 골프장에서 영친왕, 1930년. 영친왕은 일본에서 골프를 배웠다고 한다. 골프를 좋아하여 왕릉 터에 골프장이 생길 때 건설비 2만 엔과 3년간 보조금 매년 5천 엔을 하사했다고 하는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도 많다.]



나상진, 서울 컨트리 클럽 클럽하우스

   "골프 협회에 옛날 사진이 보관되어 있는데, 클럽하우스가 한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1968년에 새 클럽하우스를 설계하게 됩니다. 군사 정권 들어서고 얼마 후지요. 당시에 나상진이라는 건축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손을 댈 때는 나도 잘 몰랐던 분인데, 그 무렵 가장 정계‧재계에 가깝게 활동하던 건축가였어요. 흔히들 5.16 쿠데타(1961년) 이후 김수근이라는 건축가가 회자되지만, 나상진 선생이 더 먼저… 그런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 같고, 1961년 워커힐을 건설할 때 김수근 선생이 힐탑 바를 맡았지만 나상진 선생이 마스터플랜을 하고 본관을 설계한 것으로 보면 이 때까지만 해도 나상진 선생이 주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나 짐작하는데 정확하진 않아요.(현재는 워커힐을 김수근이 주도한 듯 알려져 있다-편집자) 워커힐 호텔이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사업이기 때문에 일부 야사처럼 흘러나오긴 하는데 공식 기록은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활발히 활동하던 나상진이라는 건축가가 서울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설계하게 됩니다. 건물은 1970년에 완공이 되고 나상진 선생은 73년에 돌아가십니다. 건물 완공되고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는데, 관련이 전혀 없는 건 아닌 것 같애요. 어쨌든 클럽하우스였다가 어린이 시설로, 다시 꿈마루로 바뀌었으니 40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은 건물이라고 볼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 건물에 대해서, 내가 작업을 할 때만 해도 기록도,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겁니다. 나상진의 설계 사무실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고, 건물에 관해 기억하는 사람도, 평가라든가 문헌 자료도 너무나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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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진(羅相晉, 1923~1973년), 건축가. 전북 김제 출생. 1940년 전주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1941년 가지마구미에 입사하여 해방 때까지 근무했다. 1952년 명동에 설계 사무소를 열고, 그랜드 호텔(1957년), 대한 교과서 사옥(1958년), 대구 파티마 병원(1960년) 등을 설계했다. 1961년 5.16 이후 대규모 건축물을 설계하는데, 새나라 자동차 부평 공장(1961년), 경기도청사(1963년) 등이 있다. 1970년 제일은행 인천 지점, 1971년 전북대학교 여러 건물들을 계획했다. 당대를 대표하는 많은 건물을 설계했음에도 건축사에 이름을 남가지 못하고 사라질 뻔한 건축가를 기억하게 된 것은 꿈마루의 또 하나의 큰 의의다.]









어째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그래서 이상하다, 하고 추적해 보니까, 이 나상진이라는 건축가가 더더구나 관심 밖인거죠. 건축계에서 아웃사이더인 거야. 나상진이 1923년생이거든요? 같은 세대에서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연세대 김종수, 유네스코 회관 설계한 배기형, 홍대 건축과 나상기, 박병주는 도시 계획이죠, 엄덕문… 이들은 상당히 명맥이 유지되고 다시 조명되는데 이 사람은 완전히 잊어집니다. 그건 어떤 다른… 계기가 있지 않았겠어요? 이 사람이 대학을 안 나왔어요. 학벌로 연결이 안 되는 사람, 기득권 무리에 못 들어간 사람인 거죠. 그런데 묘하게도 일찌감치 자수성가해서 중앙정보부며 그쪽 일을 많이 한 거예요. 기록에 따르면 일제 시대에 공업 건축학교 나온 다음에 가지마구미(鹿島組)라는 일본의 이름난 건설 회사에 들어가서 관공서 건물 짓는 현장을 돌아 다녀요. 실제 기술, 당시로서는 선진 기술을 익힌 거야. 그렇게 현장에서 공부한 걸 바탕으로 1952년에 사무실을 냅니다. 5.16 이후에는 새나라 자동차 부평 공장, 경기도청, 이런 큰 일도 하게 됩니다. 그 때는 정부의 누군가 도와 준 거죠. 그러다가 70년 무렵이 되니까, 별로 중요하지 않아진 거예요. 오히려 다른 사람 올라가려면 내치는 게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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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컨트리 클럽, 1970년 무렵. 멀리 클럽하우스가 보인다. 클럽하우스 안에서 코스를 조망할 수 있도록 수평에 유리창이 많은 건물로 설계했다.]







나상진이 설계한 서울 컨트리 클럽 클럽하우스


   "얘기를 좀 바꿔서, 우리한테 골프가 뭔가, 근대화의 산물로서 백화점이나 병원, 극장, 이런 것을 거론하듯이 골프장이라는 게 또 뭐냐. 골프는 영국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물론 귀족들이 많이 했겠지만, 그게 19세기, 20세기의 세계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 쪽으로 흘러온 거죠. 그러면서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상당한 권력과 재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참가할 수 없는 곳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요즘은 좀 나아졌는지 모르지만 전에는 흔히들 골프 친다 하면 일반 사람들은 생각할 일도 없는 별세계랄까?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일종의 계급 의식. 클럽하우스에도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어요. 경사 기와 지붕의 큰 건물을 들어가면 빅토리아풍 인테리어라든지 시대하고는 동떨어진 벽 장식들이 있고요. 스포츠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를 벗어던지고 릴렉스하는 곳이라기보다는, 장소만 전원 속으로 들어갔을 뿐 또 하나의 사교 장소랄까, 귀족이라는 게 있는 시대도 아닌데 계급 의식을 표방하니까 동조하기 어렵죠. 그런 관점에서 1968년에 나상진 선생이 이런 건물을 설계한 게 대단한 겁니다. 그런 풍조 속에서 골프장을 짓겠다는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 눈으로 보면, 이 건물은 아닌 거예요. 형태부터가 건축 사조로 보면 브루털하거든요. 기와나 벽돌을 장식적으로 쓰지 않고 맨얼굴로 승부하려고 한 겁니다. 건축이라는 것이 의뢰자로 인해서 일이 성립되기 때문에, 현실에 맞닥뜨리면, 저 스스로 겪어 봐도, 그 패러다임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상진 선생이 비록 그런 부류의 사람들하고 가깝기는 했지만 내심 거기에 대한 저항감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물론 시대적으로 여러 사람이 브루털한 양식으로 할 때지만요. 지금 시점에서 보더래도 조형적 언어가 대단합니다. 건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토목 구조물처럼 큰 기둥을 네 군데 세우고 그 위에 엄청나게 넓은 콘크리트 상판을 얹어서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만들었어요. 나무들이 지금처럼 무성하기 전에는 언덕 위에서 신전같은 경관을 이뤘을 겁니다. 클럽하우스가 가져야 되는, 수평으로 뻗어야 되고 거기서 여러 경관을 볼 수 있거나 홀에서 그 곳이 보이는 특성에 맞춰서 조형을 이뤄냈…지만, 짓고 나자마자 바로 폐쇄가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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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원경, 2011년. 원경에서 보면 처음 클럽하우스였던 시절 자아내던 건축적 이미지에 가깝게 회복하고자 했다. 사진 김재경.]







이 땅의 공공 건물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절대적 통수권자의 말 한 마디로 삽시간에 바뀌는 거죠. 1970년 가을에 클럽하우스 완공이 되었는데, 그 해 12월에 어린이 공원으로 변경 지시가 내려오고, 73년에 공원으로 문 열었습니다. 그런데 바꾸는 일에 원래 설계자를 참여시킬 수도 있겠건만, 어린이 공원 기본 계획은 홍대 부설 건축도시계획 연구소에서 맡습니다. 그러니까… (침묵) 음, 건축가로서 시대 흐름을 잘 타고 왔던 나상진 선생이 여기서 꺾이게 되는 거예요. 결정적으로는 뒤이은 정부 종합 청사 프로젝트가 타격이 컸죠. 논란이 워낙 커서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현상 공모를 해서 나상진 선생이 당선되었지만 정부에서 미국 사람들에게 재설계를 시키면서… 그것 때문에 술 마시고 홧병으로 돌아갔다는 설인데, 그 현상 설계와 이 클럽하우스 폐쇄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부종합청사는 당시 국가적 프로젝트였습니다. 지금은 광화문 맞은편에 고층으로 서 있지만, 나상진 선생은 옆으로 길고 층은 상대적으로 낮은 건물로 제안했거든요? 맞은 편 건물들(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미국 대사관)하고 호응이 되죠. 그런데 당선작이라고 상금까지 줘 놓고서는 정부에서 따로, 뒤로 몰래, 미국의 어느 회사에다 계획안을 의뢰해서 받은 겁니다. 대단한 회사도 아니었다는데, 미국에서 한 안은 높게 세운 거야. 논란이 굉장했어요. 부당하다, 게다가 이 안이 훨씬 맞다, 백기완 씨가 반격하는 일을 주도했을 겁니다. 건축계에서 여러 사람이 탄원서도 쓰고 했는데도 안 되는 거예요. 왜 미국으로 넘어갔는지 언젠가는 밝히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소문으로 돌아다니는 얘기는 여럿 있었지요. 슬픈 이야기야. 원, 한 나라의 정부 종합 청사라는 건물을 설계하면서… 그런 기억이 나네… 이 이야기도 꿈마루를 하게 되지 않았으면 떠올릴 일도 없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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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진의 정부종합청사 설계 당선안(1968년)과 미국태평양건설회사에서 시공한 현재의 건물(1972년). 이 공모전에서 나상진의 안은 가작으로 당선되어 상금이자 계약금 1600만 원을 받고 착공까지 했으나 이듬해 미국에 설계를 몰래 맡겼다. 건축사협회와 건축가협회가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 신문에서도 연일 비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백기완은 당시 언론에 이렇게 호소했다고 회상한다. "우리 나라 사람의 설계는 그 수준이 얕아서 못 쓰겠다니, 그건 개수작입니다. 미국은 이백 해 앞서까지 기껏 천막 속에서 살았지만 우리는 푸근한 초가집과 쓸모 많은 기와집, 그 집짓기의 전통을 여러 천 해 발전시켜 온 문화가 있는데도 그런다면, 그건 조국 근대화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이제 조국 근대화와 단 한 치인들 물러설 수 없는 싸움에 나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싸움은 이 땅 예술가들과 미국의 엉터리 예술가가 맞붙는 싸움이라 이기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이 투쟁이 방향을 제대로 겨누지 못한 것은, 이것이 예술가들끼리의 싸움이 아닌 데 있다. 미국의 이름없는 군수 업체에 지불한 거액의 설계비 중 일부가 외화로 반출되어 누군가의 자금이 되었다는 소문이 쉬쉬하면서도 파다했기 때문이다.] 







비정상의 정상화


   "어린이 대공원이 비교적 걸어다니기 편한 건, 그런 역사 때문이죠. 능이었던 걸 그대로 골프장으로 만들고, 다시 공원으로 한 거니까요. 근린 공원으로서는 좋은 조건입니다. 지금도 옛날의 코스가 짐작되는 부분이 군데군데 남아 있어요. 대개 사생 대회며 글짓기를 하거나 돗자리 깔아 놓고 어머니하고 애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기도 하죠. 이 공원에 유난히 조각이 많아요. 모자상, 그런 거죠. 어린이 대공원으로 바꾸면서 조각가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해서 설치한 겁니다. 그 때 어린이 공원을 설계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겠죠. 꿈마루 앞에 기념비가 하나 있습니다. 그 비에 어린이 공원으로 만들면서 도네이션 한 사람들, 개인, 기업, 기업인, 이름이 쭉 있습니다. 분야를 망라해서 몇백 명이고, 돈을 얼마 냈다는 것까지 나와요. 디자인한 사람들도 일체 무보수로 일했다고 해요. 국가가 초비상적인 힘을 동원해서 순식간에 만들어 내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데몬스트레이션 프로젝트죠. 처음에는 기념비가 그 장소에 별로 맞지 않아 보여서 없애자고 제안을 했다가, 뒤에 새겨진 기록을 보고서는 아, 이것도 그대로 남겨서 보여 줘야겠다 싶었어요. 나중에 리뷰를 해 보면 재미있을 거 겉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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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낡은 콘크리트 구조물과 새로 붙인 난간. 사진 민희기.]






   우리의 박탈된 기억

   "이 건물은 그런 과정 속에서 어린이들이 사용하기에 적당치 않은 건물로 40년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 부로, 이름은 교양관이라고 붙이고 아이들 문화‧예술 학습 공간이 되었지만, 클럽하우스로 쓰던 건물을 갑자기 어린이 시설로 돌리려니까 마땅치 않았겠죠. 그러다 보니 그 동안 어떻게 썼냐면, 사람들 기억에 제일 남아 있는 게 공룡 전시회일 겁니다. 판타지에 기댄 그런 전시들. 입구부터 다 틀어막아 캄캄한 내부 공간으로 만든 다음에 배경을 그리고, 조명 조금 하고, 여러 인공 조형물 가져다 놓고요. 어린 아이들 눈높이에서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의 디스플레이면 되니까…. 어른들에게는 별 재미 없는… 시간 때우기의 공간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잘 보이는 위치에 있는데도, 이 건물에 대한 기억이 없는 거예요. 그냥 공원 안에 있는 약간 이상한, 멋은 전혀 없는, 무뚝뚝한 건물로만 비쳐진 거죠. 견딜 수 없는 것이, 이런 구조의 건물을 어떻게 그렇게 썼는가…! 죽여 놓은 거죠. 죽였다는 뜻은, 기능의 문제도 있지만 사람들이 기억을 못하게 했다는 것, 40년 동안이나 그렇게 두었다는 것입니다. 공공 공간을 내동댕이치고, 그나마 내버려 둔 것도 아니고 이상하게 변형을 가해서 쓰는 그런 무심함. 그 전에는 클럽하우스였지만 절대적인 힘에 의해서 73년부터는 공공 건축이 된 거죠. 국가의 공공 공간을, 수많은 당시 건축계 학자와 중진들이 작업했음에도 이렇게밖에 못했다는 것이…. 어린이대공원 자체에 대해서도, 골프장이었다는 역사도, 그 전에 뭐였는지도 기억이 사라지고, 고작 능동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는 거잖아요. 어떤 장소를 통해서 뭔가 계승이 되어야 되는데, 계속 이거에서 저거로 퐁퐁퐁퐁 순간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숙성이 안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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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2층의 피크닉 가든. 클럽하우스에서 남자 탈의실과 사우나였던 공간이다. 당시 외벽을 남겨 감싸는 느낌을 주면서도, 지붕을 뜯어 햇볕을 들게 하고 나무를 심었다. 사우나 욕조가 있던 자리에는 작은 연못을 두었다. 사진 김재경]








쓸모가 다한 건물을 살려낸다면, 건축가는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꿈마루로 돌아와서, 나는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 즉 기본 계획만 하기로 하고 시작했어요. 서울시에 새로운 설계를 위한 예산이 없으니 정상적 설계를 할 수 없었죠. 우선, 공공 건물은 행정 상황이나 재정 조건이 부합이 되지 않으면 진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 지으려고 했던 작은 건물의 예산에서 더 이상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큰 건물을 고쳐 쓰도록 맞출 방법을 내야 했습니다. 실은 처음 최광빈 국장에게 남기자고 제안을 했을 순간 아이디어는 이미 떠올라 있었습니다. 관리소에서 요구한 시설은, 사무실, 회의실, 통신실, 화장실 등 해서 기존 공간의 삼분지 일쯤 되었습니다. 교양관 전체 면적이 오천 평방미터쯤 되는데 필요한 것은 천사백 평방미터 정도, 예산도 딱 그만큼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나간건, 지어진 다음 유지 관리도 그 삼분지 일의 면적을 유지할 돈으로 할 수 있게 맞추려고 했습니다. 유지 부분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요. 공원 안의 시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역 고가 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쓸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기둥이나 지붕은 있지만 바깥으로 바꿔 버린다는 것인데요. 건축이라는 것이 쓸모가 끝났을 때, 또는 기능이나 조건이 바뀌었을 때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로 쓸 수 있는 부분만 살리고, 이것을 풍화되는 과정 속에 두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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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룡, 꿈마루 개념 스케치 중 2층 부분. 노란색 부분은 실내 공간으로 남기는 부분, 갈색 벽돌을 깐 부분은 천장은 있지만 반개방된 부분이고, 녹색 나무를 심은 부분은 천장을 뜯어 아예 밖이 된다.]



   젊은 건축가와의 협업


   "알고 지내던, 최춘웅 교수(당시 고려대 건축과)에게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어요. 학생들하고 현장 실측도 하고, 도면화하고 모형 만드는 초기 작업을 해 줬고요. 그 때 최춘웅 교수, 처음으로 되돌리는 총체적 복원과 대(對)하는 ’편집적 복원’이라는 말이 있다고 소개를 해요. 옛 건축에 손을 댈 때 개조라고 하지 않고 인터벤션, 개입(intervention)이라는 말을 써요. 사람 사이 서먹해졌을 때 찔러 본다고 하잖아요. 무슨 개념으로 어디까지 손을 집어 넣어 볼 건가, 그랬을 때 어떤 반응이 올 건가를 가늠해 가면서, 원형질을 보존하고 새로운 생각을 집어 넣으려는, 그런 관심이 전부터 있었어요. 선유도공원에도 그런 부분이 있지만 그 때만 해도 오히려 환경 문제를 머리에 두었다면, 꿈마루를 할 때는 기존에 있던 디자인에 새로운 계획가가 어떻게 개입(인터벤션)을 할 건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미국이나 선진국에서는 조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단어가 있었나 본데, 새롭게 다가왔어요. 최춘웅 교수는 리모델링 방법을 의논을 할 때도 상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현장을 맞닥뜨리면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요. 여기까지 해? 말아? 그런 고민할 때 의논할 상대역이 있다는 게 도움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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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2층, 북동쪽 로비에서 남서쪽을 본 모습. 힘차게 뻗는 천장 보는 브루털리즘 건축의 구조미를 느끼게 한다. 멀리 흰 벽에 보이는 벽화는 디자이너 안상수의 작업이다. 40여 년 전 홍익대 학생 시절, 안상수는 유강열의 제자로 교양관 인테리어 작업에 참여했고, 그 인연으로 꿈마루 리모델링 때 추억을 살리며 작업을 함께 했다. 사진 김재경]


   건축 문화재, 복원이냐, 보존이냐

   "전에 내가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으로 있으면서 관심 가졌던 것이 유네스코의 문화 유산 보존 방법이었어요. 복원은 150년 동안 유럽 사회에서 꽤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 논란을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존 러스킨(John Ruskin)하고 비올레 르 뒥(Viole le Duc) 얘기가 나와요. 비올레 르 뒥이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나 카르카손 성을 예쁘게 복원했죠. 지금도 훌륭한 관광 자원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걸 당대에 존 러스킨이 비판하고 나섭니다. 그건 복원이 아니다, 시대의 선후 관계를 애매하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파괴다, 하고요. 그러면서 일어난 논쟁, 그리고 20세기 들어와서 파르테논 신전 복원 등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유럽 사회가 도달한 결론은 복원에는 건축의 진정성(authenticity)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보강이 꼭 필요하다면 반드시 후대 사람들이 그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써야 됩니다. 한창 경복궁 복원 바람이 불 때였어요. <대장금>에 나오는 소주방을 복원한다느니… 위원으로서 상당한 회의가 있었어요. 경복궁은 옛날, 대원군 때는 천 개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지요. 천 개 건물의 지붕이 경복궁에 차 있는 걸 상상해 보고, 그 뒤로 북악산, 인왕산까지 상상해 보면 엄청난 풍경일 겁니다. 그 느낌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게 자아내는 게 중요한 거지, 지금에 와서 자료도 없는데, 그냥 일제 강점기에 찍힌 몇몇 사진과 『북궐도형』 가지고 이 시대의 몇몇 건축가나 전문가가 추정해서 짓는 건, 복원이 아니라 신축이지요, 신축. 그런데 그걸 이루느라고, 그 장소에 그나마 남아 있던 원래 기초라든지 땅 아래 유물은 오히려 다 파괴해 버리거든요. 어떻게든지 지금 상태를 잘 견디도록 유지를 하는 것이 우선이고 재현은 그 다음에 다른 방법을 찾자는 주장을 한참 했어요. 당시 유홍준 청장도 상당히 귀를 기울여 줬습니다. 그런데 한참 보류되었던 소주방도 최근에 다시 지었잖아요. 10년만에 도로 후퇴한 기분이 드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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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집 속의 집. 1층의 상황실, 2층의 사무실과 회의실, 갤러리, 화장실 등 필요한 어린이대공원 사무소에서 필요한 공간 만큼을 집어넣고 나머지를 모두 외부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건축비는 물론 유지관리비도 줄이게 했다. 사진 김재경]






   건축 개입 실전 : 집 속의 집

   "현장 조사를 해 보니까, 외관을 두텁게 막아서 썼고, 전시할 때마다 계속 칠하고 개조하다 보니 내부도 상당히 변질되어 있었어요. 개입(인터벤션)에 대해서 두 가지 문제를 만났는데, 하나는 외관을 어디까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하나는 클럽하우스로 쓸 건 아니기 때문에 원형을 어느 정도까지 보존하면서 새로운 쓸모의 공간을 집어 넣을 것인가였습니다. 첫 번째는 건물 자체의 문제라면 두 번째는 그 공간을 리모델링할 때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는가의 문제죠. 어려운 건 콘크리트에 너무 변질을 많이 가해 놓았기 때문에 그걸 제거하는 데만도 엄청난 돈과 시간이 걸리는 거예요. 중간에 멈췄어요. 들어가는 노력에 비해 더 손을 댈수록 점점 원형이 없어지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변질된 콘크리트 자체를 안고 가기로 한 거지요.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은 이 건축이 원래 매우 구조적인 시스템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수직적인 기둥과 거기에 얹혀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보가 만들어 내는 그 구조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마 그것이 제일 처음 클럽하우스를 만들었을 때 개념일 테니까요. 클럽하우스 때는 외벽이 거의 유리였습니다. 바깥을 멀리 조망할 필요가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외관이 일부 깨끗하지 않더라도 뭘 덧대지 말고 어떤 형식으로든 그 원형이 드러나도록 만들고 그 안에 삽입하는 새로운 기능은 구조적 전체 구성에 방해가 안 되는 방법으로 하자, 집 속의 집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거죠. 다행히 이 집은 건물의 층고도 높고, 그 안에 다른 집을 삽입하기가 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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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에서 본 꿈마루 입구. 교양관 시절 MDF 가벽으로 얼기설기 틀어막았지만 클럽하우스 때 이 곳은 유리였다. 원래 설계대로 유리였던 부분을 막았던 벽체는 모두 제거하되, 다시 유리를 끼운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철제 창틀로 여기가 내외부의 경계였음을 알리는 가상의 벽을 세웠다. 사진 민희기.]


   우리 사이의 거리

   "그래서 원경으로 보면 마치 복원한 것처럼 맨 처음에 이 집을 설계할 때 나상진 선생의 스케치와 비슷하게 돌아간 듯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작은 집이 삽입되면서 여러 크고 작은 공간들이 새로이 생겨납니다.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이라는 사람이 쓴 『숨겨진 차원(Hidden Dimension)』이라는 책에 ’프로세믹스(proxemics)’라는 이론이 나와요. 사람이 느끼는 거리감을 네 단계로 나눈 건데요, 가장 가까운 거리(인티미트 디스턴스)가 20센티미터 정도고, 두 번째가 퍼스널 디스턴스로 45센티미터부터, 그 다음이 소셜 디스턴스로 1.2미터부터, 제일 마지막 단계가 3.6미터를 넘어서면 퍼블릭 디스턴스라고 해서 공적인, 열린 공간으로 느낀다는 겁니다. 물론 문화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겠지만 큰 의미는 적용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꿈마루 전체의 입구는 굉장히 거대한 공간이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부분은 두 사람이 걸어간다고 하면 꽤나 가깝게 느껴질만큼 좁아요. 퍼스널한 거리쯤 되겠지요. 뻥 뚫려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 공간이지만 이렇게 설정하면 큰 공간과 작은 공간의 대비를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사무실과 화장실이 있는, 벽돌 공간을 지날 때면, 약간 넓어지지만 그래도 트이진 않은 느낌이 들죠. 그걸 지나서 피크닉 가든에 이르면 거의 퍼블릭한 넓이가 마련됩니다. 도시의 작은 광장이나 네거리만큼 넓어지면서도 둘러쳐진 벽 때문에 미묘한 기분이 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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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2층 화장실을 지나 피크닉가든으로 이어지는 공간. 빛과 어두움, 좁은 공간과 넓은 공간이 꿈마루 안에서 이렇게 이어진다. 보존에 관해서는 유네스코에서 제시한 건축의 진정성을 끌어왔다면, 내부 공간의 세세한 조정에서는 사람이 그 안에서 활동하며 느끼게 될 다양한 감각을 염두에 두었다. 사진 민희기.]


   공간이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면

   "또 한 가지 더한 건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느슨하게 했다고 할까요. 꿈마루에선 모퉁이를 돌아 들 때마다 바깥이 계속 따라 들어옵니다. 바람도 안으로 들어오고, 눈이 오는 날, 비 오는 날… 꿈마루를 거쳐서 공원의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사이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지만 여러 가지를 감각할 수 있게요. 그건 곧 이 도시 안에서, 우리가 일상 생활하면서 별 신경 쓰진 않지만 늘 느끼게 되는 것이기도 하죠. 꿈마루를 들어가서 점점 안으로 공간이 진행되면서, 계속 바뀜이 일어납니다. 끊임없이 바뀌면서, 하여튼 조금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그런 공간. 어떻게 보면 꿈마루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긴 빛도 있어요. 요즘 법규에 맞추느라고 엘리베이터를 하나 놓으면서 그 위 지붕을 뜯었어요.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통을 타고 빛이 천장부터 아래층까지 들어옵니다. 사실 꿈마루 안이 어둑어둑해요. 유지 관리 비용을 낮추려고 조명 기구도 최소로 줄였고 일체 시설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깥같죠. 여기저기서 빛이 들어와 난반사하고 바람도 통하거든요. 음, 기분이 아주 나쁘지 않은 다리 밑 같다고 할까요. 우리가 그 어두운 다리밑 같은 커다란 공간을 통과하는 사이에 끊임 없이 스케일이 바뀌고, 조금씩 조금씩 다른 농담의 빛이 섞여 들고, 환한 피크닉 가든을 거쳐 더 밝은 북 카페가 저기 위에 보입니다. 오는 사람들을 관찰을 해 보면, 오히려 애들은 민감하게 알아채리는 거 같애요. 들락날락 계속 위로 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빛의 바뀜에 대한 어린이 나름의 느낌이 있는 거 겉애요.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한 거니까요. 구조물을 만들지 말고, 움직임이 일어나게 만들자, 그저 그 공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흐름들을 따라서 잘 갈 수 있도록 제공만 하자, 어느 정도 들어맞은 것 같아요. 공사 과정에서는 관청하고 논란도 있었고 우려도 있었지만, 방문한 사람들이 잘 활용하고 기분 좋아하는 듯 보여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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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루돌프(Paul Rudolph), SMTI(지금의 UMass Dartmouth) 투시도, 1964~1966년. 브루털리즘의 대표 건축가 폴 루돌프는 1960년대 우리 나라는 물론 세계 많은 젊은 건축가들에게 우상으로 여겨졌다. 나상진의 클럽하우스 설계 도면에서 떠올리게 되는 건물이다.]


   옛 사람의 마음을 지금 읽는 일

   "이 작업을 하면서 나상진이라는 건축가가 클럽하우스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 건축을 어떻게 실현했나를 생각하게 되죠. 우선 클럽하우스의 관습적인 형식을 안 따른 겁니다. 아무리 인테리어 치장을 잘 해도 코지한 기분이 안 날 정도로, 바깥의 랜드스케이프를 어떻게든 끌어 들이려고 노력을 한 거죠. 그리고 당대 유럽이나 일본, 미국에서 적용하던 재료나 디자인 요소를 가져 왔습니다. 요즘 표절 얘기가 많은데, 건축은 실제로 사용을 해야 되는 속성상 공간의 쓰임에 대해 선례나 관습을 따르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나상진이라는 건축가가 당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여러 사례들을 공부해서 넣은 건 사실이고 또, 나름대로 당시 국내 산업에서 할 수 없던 기술을 시도했습니다. 내가 학창 시절에 폴 루돌프에 심취했던 걸 떠올리면서 이 클럽하우스 설계를 보면 대단하다는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콘크리트 기둥에 세로로 홈을 판 것은 사족처럼 보여요, 기둥 두께가 실제보다 약간 날씬해 보이는 기능이 있긴 하지만, 난 좀 크게 보였어도 좋았겠다는 느낌인데,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없는 수법이니까 재미있어 하죠. 콘크리트로 뭔가 표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당시 건축가들에게는 무척 하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꿈마루의 경우 나상진 씨는 나무로 만든 콘크리트 거푸집에 일일이 각목을 대어서 홈을 낸 다음에 나중에 그걸 깨서 만들었는데, 그렇게 하면 품이 너무나 많이 들고 건설비가 비싸니까, 그 시절 어느 건축가는 거푸집에다가 새끼를 꼬아 붙여서 시도하기도 했어요. (웃음) 요새 사람들은 이해도 못할 것이, 콘크리트 벽을 매끈하게 만들어 내는 것도 힘들던 시대였어요. 이 건물에서 나상진은 콘크리트로 요철을 표현해 낸 기둥, 콘크리트 판을 공장에서 만들어서 조립해 보기도 했고(피크닉가든) 약간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에로틱한 부분도 있고(여자 룸 사우나), 돌로 쌓은 프리미티브 형태의 구조물을 직선적인 콘트리트 구조에 섞기도 했습니다. 그 분이 그 때 하고 싶었던 거겠고, 조합이라고 그렇게 폄하할 필요는 없는 듯 싶고, 재미있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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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진, 클럽하우스 2층 평면도, 1968년. 오른쪽 끝까지 위아래로 길게 평행한 두 공간이 라커룸, 왼쪽 위에 도드라진 곡선이 여자 사우나에 해당한다. 왼쪽 아래의 둥근 공간들은 스타트하우스였다.]



   한 공무원이 해 낼 수 있는 몫

   "원래 입찰을 거쳐서 관리소를 짓기로 정해져 있던 설계 사무실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우리가 계획한 기본안을 가지고 그 사무실에서 실시 설계(실제 건설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세부까지 상세하게 작성한 설계)를 했어요. 그런데 실시 설계 도면을 받아 보니 도대체 쓸 수 있는 게 아니죠. 그 상태에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공사 기간 내내 현장에 상주하면서 모든 도면을 새로 그렸습니다. 철거가 이루어지면서 삐뚤삐뚤한 부분들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실측한 다음에 처음 생각했던 개념이 어떻게 구현이 될 건가를, 그때그때 그릴 수밖에 없는 거죠. 서울시에서는 제가 만든 안대로 공사가 되는지 지도만 하라고 했지만, 그게 말로 되는게 아니잖아요. 시공하는 회사한테든, 감독하는 공무원들한테든 기준을 줘야 되는데… 할 수 없이 돈도 못 받고 일을 다 한 거야. (웃음) 그래서 내가 이 원인 제공을 한 최광빈 국장한테 나중에 이 집 완공이 되면 국장으로서 두 가지를 약속을 해라, 내가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이 모든 과정과 나상진이라는 건축가를 조명하는 전시회를 열어 달라, 두 번째는 서울시가 선유도공원과 꿈마루를 엮어서 이러한 종류에 대한 첫 번째 사례로서 책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영어로 만들자. 그런데 이 분이 다른 데로 발령이 나 버리면서 전시회만 열어 주고 책은 아직도 안 나오고 있습니다. 계약서를 쓴 건 아니니까요. 전시 하나도 어마어마하게 고생하면서 만들어 내더라고요. 시가 그런 이해가 없고, 푸른도시국이라는 위상도 그렇고요. 결과로 보면 최광빈 국장이 대단한 일을 한 겁니다. 어떻든 개관하는 날에 당시 시장이 오셨고 굉장히 흡족해 했고, 그날 밤으로 블로그에다 두 페이지나… 그 시장 역사상 하나의 건축 얘기에 그렇게 길게 할애한 적이 없었다나요. 내용도 상당히 감동적인 글을 썼는데, 그러고 두 달인가 있다가 사퇴를 하죠,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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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PC 콘크리트 구조체를 활용해 화단으로 삼았다. 뒤로 콘크리트 기둥의 요철은 폴 루돌프가 즐겨 쓰던 건축 요소다. 기둥을 가늘게 보이는 효과를 준다.]



   그 곳에 스민 시간을 읽으려 하는 마음가짐

   "그렇게, 일을 통해서 뭔가 깨우쳐 가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그게 시정에도 반영이 되고 자꾸만 알려지고 그 의미를 북돋아 줘야 하는데, 잘 이어지지 않는 거죠. 지금도 도시 재생이다, 뭐다, 말을 붙여서 자꾸 하는데 걱정되는 부분도 있어요.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서 읽어 내는 데도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 각각의 케이스에 맞는 길을 찾아야지, 일종의 스타일로 가져가 버리면 곤란하거든요. 개념은 그 땅, 그 자리에 있는 그것 자체, 거기에 스며 있는 시간을 읽어 내려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스러진 옛 흔적과 새것의 조합도 그렇게 읽어 내는 과정에서 태어난 거지, 처음부터 그런 스타일을 상상하며 추구한 것은 아닙니다. 꿈마루가 만약 철골 건물이었으면 전혀 다르게 되었을 공산이 많은 거죠. 콘크리트는 노출되어 쓰이는 것인데, 거기에 누군가 모르타르를 막 바르고 칠해서 못 쓰게 만들어 놓은 거잖아요, 그 상황을 다시 어떻게든 원래 있던 형태로 돌리려는 하는 중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흔적이 남은 겁니다. 워낙 많이 훼손된 흔적들을 새롭게 쓰는 부분, 변질되지 않고 남은 부분과 어떻게 결합하고 공존하게 할 건가, 그런 고민을 했을 뿐입니다. 새로 짓는 카페에서 인테리어로 빈티지처럼 보이게 했다고 한들, 거기에 무슨 시간성이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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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는 기능성을 높이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하늘로 뚫려 천장의 빛을 바닥까지 끌어 오는 빛기둥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천장을 더 많이 뚫고자 계획했으나, 결국 엘리베이터 위만 뚫었다. 사진 김재경.]






   우리 근대 건축 문화재에 대해서


   "공사를 해 나가는 동안 생각을 계속해 나가면서 겁이 나는 거예요. 내 자의로 이렇게 손을 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건가. 사실 애초 계획할 때는 위층에 지붕도 뚫고 1층 홀에도 나무를 심으려 했습니다. 그건 현장에서 공사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막은 겁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안 한 게 잘 한 거야. 그래서 공사가 제법 되었을 무렵 건축사학자들하고 건축가들을 몇몇 초대했습니다. 현장에 나타난 그 분들 얼굴을 마주하니까 아차, 내가 짧았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보면 도코모모(DOCOMOMO, 근대건축보존회)나, 이코모스(ICOMOS, 기념물유적협의회) 같은 활동의 근접한 사례가 될 수 있는데 아 왜 나 혼자서 고민했는가, 좀 더 의논하며 함께 해 나갈 수도 있었는데 싶더라고요. 그래도 다들 이 작업을 좋아해 주셨습니다. 또 후회가 된 것이, 여기 그 분들을 위한 작은 모임 공간 하나라도 만들도록 서울시에 어떤 다리를 놓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 생각을 미리 못했나…. 우리 나라에 1970년대 이후에 들어선 근대 건물이 거의 지어진 지 3, 40년 넘게 되었습니다. 아파트는 30년 넘으면 재건축 이야기가 나오지만, 다른 건물들은 슬슬 문화재에 들어갈 수 있는 연한이 되어 갑니다. 김수근 선생이나 김중업 선생의 건축 다수는 문화재에 등록이 되겠지요. 그렇다고 보면, 문화재급의 건축하고, 문화재급은 아니더라도 남길 만한 건축을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재는 보존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건축은 어떻게 활용할 건가를 생각해야겠죠. 그런 건물의 대부분이 콘트리트 건축이라는 겁니다. 내 생각에, 그렇게 재생해서 쓸 때 가장 중요한 건, 그 집의 시간을 잘 살펴야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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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마루 조경은 박승진이 맡았다. 예전에는 카트나 골프백을 끌고 내려와 1번홀이 시작하던 램프였는데, 상상 속의 동화가 숨겨진 것 같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사진 민희기.]






   품위 있는 풍화라는, 어떤 공공성

   "『온 웨더링(On Weathering : The Life of Buildings in Tim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풍화에 대해서라는 뜻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