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는 어떻게 집을 사람으로부터 분리하는가
함 : 오늘은 한국 건축계의 큰 스승 건축가 조성룡 선생님을 모시고 대화를 나눕니다. 선생님은 한국 건축계가 생각해 봐야 하는 인문적 화두를 던지는 건물들을 지어 오셨고 실현되지 못한 설계안을 통해서 오히려 더 많은 화두를 던지셨지요. 또 인간, 땅, 시간이 증발해버리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한국 현대 도시개발의 역사와 관련하여서도 깊이 성찰해봐야만 하는 지점들을 건축가로서 교육적 실천으로서도 조용히 제기해 오셨습니다. 인간, 땅, 시간, 예술, 집, 도시 이런 지점들은 말 그대로 인문적 사유의 핵심적 대상이 아니겠습니까. 조성룡선생님을 한국사회에서 ‘인문건축가’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 드물고 귀한 사례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에, 오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학 웹진 <웹진 민연>에서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평생 선생님께서 건축가라는 직업인으로 살아오셨으면서도 평소 ‘건축’이라는 말보다는 ‘집 짓다’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고 하신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어요. 그 말씀에 담긴 생각이 무엇인지 우선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조 : ‘건축(建築)’이라는 말은 한자잖아요. 그런데 원래 옛날에는 건축이라는 말이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조선시대까지도 건축이라는 말을 안 썼고요. 비슷한 말로 ‘영조(營造)’ 같은 말은 있었습니다. 정확히 확인은 안 해보았지만 건축이라는 말은 아마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영어로 건축에 해당하는 ‘아키텍쳐(architecture)’라는 말을 일본 사람들이 많은 서양말을 근대에 번역하던 것처럼 한자로 옮긴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뭘 이렇게 세운다, 세워서 구축한다는 그런 뜻으로 번역한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것도 따져보면 정확한 서양어 직역도 아닙니다. 라틴어에서도 보면 아키텍쳐는 ‘큰 기술’이라는 뜻이죠. ‘아키’라는 게 큰 거고 ‘텍쳐’는 기술이니까. 여러 다른 기술들을 다 아울러서 뭘 만들어내는 그런 뜻이라고 그래요. 그런 면으로 보면 조선 시대 대 쓰던 ‘영조(營造)’라는 말과 비슷해요.
‘영조’라는 게 단지 집을 세운다가 아니라 뭘 이렇게 궁리를 해서 만들어낸다, 그런 뜻으로 보면 영조가 맞다고 보는데, 어쨌든 이 말이 근대화, 근대교육이 되면서 ‘건축’이라는 말로 바뀌어 굳어져 버렸죠. 이제는 모두 건축이라는 말을 쓰는데, 제가 학교에 학생들하고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하다가 보니까 ‘건축’이라는 말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차이를 틀렸다기보다는 이해의 차원에서 우리가 다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건축이라는 행위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게 집 짓는 거죠. 사람이 거주하는 집. 가장 작은 단위의 집이라면 옛날에는 움막에 살다가 뭐 동굴에 살다가 드디어 불도 발견하고 그랬겠죠. 그런데 불을 알게 되고 불을 중심으로 뭔가 이렇게 같이 모여 사는 그런 것이 구현이 되면서 거주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여기저기 그냥 돌아다니며 잠깐 그냥 머무는 거지, 거주라는 개념은 아니었을 거고, 특히 농경사회가 되면서 어느 장소에서 움직이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그런 개념이 생기면서 ‘집’이라는 게 좀 더 분명한 개념을 갖게 되었겠죠. 그런데 이 집의 개념은 사람의 일생하고 뗄 수가 없지요. 인간이 태어나고 죽고 하는 그 장소는 결국 집이거든요. 바깥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옛날에는 병원이 없었으니 대부분 집에서 죽었고 집에서 문상을 치렀지요. 이렇게 집에서 태어나 집으로 돌아간다고 보면 결국 집이라는 것은 태어나서부터 마지막까지 사람의 인생 전부를 담는 큰 그릇인 거죠.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공간이고 중요한 장소인거예요.
그런데 근대화되면서 도시화되면서 집의 개념이 점점 희박해지고 아까 얘기대로 집을 짓는다는 개념보다 건축이라는 개념, 기술 혹은 또는 뭘 이렇게 만들어내는 그런 개념으로 바뀌면서 집이라는 것이 그냥 어떤 상품으로 돈을 주고 사는 소유권 개념으로 바뀌죠.
함 : 집이라는 게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는데, 근대화와 도시화라는 게 ‘집-건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집을 삶과 분리되는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옛날에는 집이나 땅에 소유권이 없었습니까?
조 : 적어도 지금과 같은 개념의 땅-집의 소유권은 없었다고 봐야죠. 지적도(地籍圖)라는 게 생긴 게 우리나라 일제강점기에요. 처음으로 일본사람들이 들어와서 지적 정리를 하죠. 그 전에는 지적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지금처럼 선으로 땅을 분할하는 개념이 없었어요. 도시화되면서 지적이라는 개념이 생겼어요. 물론 옛날에도 소유권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 소유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땅은 기본적으로 왕의 땅이고, 그 중에 개인 소유라면 양반이나 귀족 같은 존재의 땅이 있는 거죠. 동네나 커뮤니티는 양반과 귀족의 소유권이 있는 땅에 일하는 소작농이나 하인으로 구성되고, 그들은 소유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토지에 속박된 노예거나 일시적인 경작권을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땅에 대한 보편적인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서울 북촌도 그래요. 북촌도 그게 지금 저렇게 작은 한옥이 있지만, 옛날에는 거기에 전부 조선시대 수도를 개성에서 이리로 옮기면서 공신들한테 나눠준 거예요. 너 여기, 김 대감은 여기,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이 자기 가솔들하고 하인들하고 같이 영지를 만들고 그렇게 하다가, 지금처럼 개인 소유권 중심으로 ‘주인’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 때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지적이 되면서 여러 가지 도시에 변화가 생겼거든요. 지금 경북궁 근처에 있는 한옥이라는 것도 옛날부터 있던 한옥이 아니고 그때 땅이 정리가 되면서 잘게 쪼개서 만들었고, 워낙 조그맣게 자르다보니까 담을 지을 만큼 땅이 없었어요.
그 다음에 또 하나 여기서 중요한 게 근대라는 게 집터하고 일터를 분리시켰지요. 자기 집에서 일터를 가려면 뭘 타거나 한참 가야되는. 옛날에는 집에서 일하거나 집과 일터가 일치했거든요. 특별한 사람을 빼놓고는 대부분 지금은 전부 일터로 가죠. 그러다보니까 이 집이라는 게 머무르는 시간도 줄어들고. 그리고 옛날에는 대가족 제도였지만 이게 핵가족으로 바뀌면서 집의 거주 형태도 달라지고. 결정적으로 집의 개념이 크게 붕괴되기 시작한 게 70년대 이후에 도시가 확장되면서 신도시도 생기고 점점 아파트라는 제도가 생기고 아파트 시스템이 생겨서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여 사는 모여 살게 되면서 달라졌어요. 옛날처럼 태어난 자기 동네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일터를 따라서 움직이면서 원래 태어난 곳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데에서 일을 하게 되고, 일을 하면 거기에 집을 얻어야 되니까.
그런데 그때 집을 엄청나게 많이 지어요. 우리나라 주택 부족을 커버한다는 이유였는데 부족분을 다 채우고도 계속 지어요. 새로운 사업으로써 부동산이 생긴 거죠. 집은 목적 자체가 산업으로 바뀌고, 거기서 집의 의미가 완전히 붕괴됩니다. 그러니까 집의 의미가 뭐라 그럴까. 집을 한자로 쓰면 ‘가(家)’잖아요. ‘가’자 위에 지붕이 있고 안에 ‘돼지 돈(豚)’자가 들어가 있거든요. 가축하고 같이 살았으니까. 그런 전통적인 의미는 이제 완전히 없어지는 거고. 옛날처럼 태어나고 죽는 공간으로서 집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죠. 한편으로 태어나고 죽고 사는 공간이 사회적으로 복지시설, 의료시설 이런 영역으로 흡수되면서 병원에서 다 처리가 되는 그런 시대가 되는 거죠. ‘집’의 의미 변천사를 이해하는 일은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해하는 일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함 :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집이라는 개념의 문제는 산업화라든가 근대화 문제하고 상당히 관련이 되는데, 그런 부분은 시대적인 추세이기도하기 때문에 서양에서도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조 : 당연히 거기도 그랬죠. 처음에는 집터 일터 같이 있다가 산업혁명 이후에는 공장이 많이 들어서고 그렇게 결국은 일터라는 게 생기면서 도시가 포화상태가 되니까 조금 여유 있는 사람들, 중산층 이상은 전부다 교외로 나가죠. 그래서 교외가 발달되고. 그런 건 물론 철도가 이제 생기고 자동차가 생기면서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에 교외라는 것이 또 생기잖아요. 그런데 서양은 이 변화가 한 150년 동안 천천히 진행이 되요. 한국은 그걸 거의 압축적으로 몇 십 년 동안에 한 거죠. 물론 부분적으로는 일제강점기 때도 교외화가 조금 있었는데 그건 뭐 거의 미미한 존재구요. 거의 해방 후에 70년대, 그러니까 ‘우리도 잘 살아보세’ 하면서 공장 많이 짓고 이렇게 하면서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도시에 몰려들고, 그 사람들 수용하기 위해서 집을 많이 짓고. 그러니 교외에다 지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이제 교외가 됐는데 이게 해봐야 우리는 50년, 60년 정도 밖에 안 되는 거죠. 똑같은 변화인데도 너무 폭이 좁은데 그걸 이렇게 수용하기에는 너무 힘든 거예요. 이게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 풀기가 쉽지는 않아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거든요.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 집을 쉽게 가질 수 없는 노동자하고 자본가와의 문제, 또는 환경의 문제, 그 다음 기술적인 문제. 이런 것들이 겹쳐 있어서 어려운 문제를 우린 빨리 해치워버린 거죠. 정말 해치운 거예요. 전혀 불가능한 일을 그냥 순식간에 다 해버린 거죠. 우리가 개발 속도, 발전 속도가 빨랐다고 볼 수는 있는데 그만큼 또 폐해가 많은 거죠.
함 : 그 속도의 문제와 더불어서 한국에서 근대화라고 하는 게 속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삶에 밀착되어 있지 않은 서구적인 모델이나 이론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을 거의 쓸어버리는 문제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다가 보니 한국 도시의 집이라는 게 전통적인 시간과 현대적인 시간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우리 삶과 타자의 삶의 모델 사이의 간극 때문에 생기는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삶의 표면과 실재 사이의 분열 같은 문제잖아요. 이것은 삶의 내실의 문제이기 때문에 삶의 인문성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인 듯합니다.
조 : 굉장히 대답하기 어려운 부분이긴 한데요. 그러니까 삶의 분열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텐데요. 그 중에서 우리 근대화가 서양과 프로세스는 비슷한데 시간, 즉 속도의 문제가 분명히 있는 거고요. 두 번째는 우리 스스로가 필요에 의해서 한 게 아니고 일제강점기 동안에 어떤 식민지 도시에서 갑자기 일어난 문제들이거든요. 예를 들면 서울역 같은 건물만 하더라도 지금 있는 자리에 세운 게 우리가 그렇게 세우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일본사람들이 자기네 필요에 의해서 중국으로 가는 철도를 놓으면서 그 자리에 생긴 거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올바른 근대화가 20세기 초에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있죠. 우리가 주체가 되어서 우리 필요에 따라 세워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타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건물들, 도시화인 거죠. 그런데 그런 문제인식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괜찮은데 마치 우리가 스스로 해낸 근대화처럼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또 그런 생각의 오류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간다는 거죠. 해방이 되면서 이제는 우리 제대로 하자, 라고 시작을 했었어야 되는데 역시 또 별로 달라진 게 없고, 또 해방되자마자 6.25 전쟁 나고 또 10년 있다가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한 30년 동안, 그리고 1988년 올림픽 때까지 거의 그냥 그런 사회잖아요. 폐쇄된 사회, 또는 자율적으로 뭘 해낼 수 없는 그런 사회이기 때문에 올바른 근대화가 진행이 됐는가, 지금까지 이게 좀 의문이에요.
그러니까 부분적으로는 모양이나 내용을 갖췄지만 대부분이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는 거고, 우리 국민들 모두 상당히 많은 사람들 의식에 근대화가 주체적으로 잘 됐다고 자꾸 여기는 거죠. 문제의식이 희박하니까 이 문제를 여전히 여전히 그냥 숙제로 남겨놓고 극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거든요. 서구와 우리가 이미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도 하고. 그런데 근대화나 도시화의 수준, 건축의 문제 역시 좀 깊게 따져보면 어떤 것들은 굉장히 많이 수준 차이가 나요. 특히 우리 필요에 따라 주체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서구의 도시화 과정처럼 중간에 따져서 그 과정을 한 번 더 거쳐서 이렇게 이룩하는 거하고는 차이가 있거든요.
건축과의 경우로 한정해서 볼 때 큰 문제도 공과대학에 들어가 있다는 거죠. 선진국은 독립된 학교가 굉장히 많거든요. 물론 공과대학에 건축가가 들어있는 학교도 몇 개 있어요 유럽에. 예를 들면 취리히 공과대학, 그 다음에 밀라노 공과대학, 이렇게 해서 몇 개 있지만 거기는 전통이 굉장히 오래됐어요. 옛날에 폴리테크닉 때부터 쭉 오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 건축가가 들어있지만 그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건축대학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로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것은 그런 공과대학에서 하지만 건축가가 될 사람은 또 다른 대학에 가서 공부하거든요. 아니면 두 개 다 공부하거나. 어차피 기술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데 그런 장치가 있는데 우리는 그게 없는 거죠. 오로지 공과대학. 일본도 공과대학인데 일본은 그 대신 뭐가 있냐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가면 거기에 좋은 건축가가 있는 거예요, 선생이. 그래서 그 대학원에서 이론을 공부한다기보다 그 선생 밑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좋은 건축가들이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안 되거든요. 겸업이라고 그러나요.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이 학교 교수가 못된다든지, 그런 어떤 제도에 얽혀서 뚫고 못나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일본은 그 시스템을 가지면서도 융통성을 가지고 운영을 해요.
그래서 지난 90년대 말에 5년제가 도입이 됐어요. 사실 나도 맨 처음엔 찬성을 했는데 문제가 많은 거예요. 우리 실정에 5년제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5년제라는 건 그냥 4년+1년이 아니라 선생이 달라요. 굉장히 다른 선생이 많이 필요한데 우리 공과대학 시스템에서는 그걸 공급을 못해요. 별도로 건축대학이 되어야 합니다. 건축대학이 되면 거기서는 실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선생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그런데 그런 건 안 만들어 놓고 제도만 만든 거죠. 그래서 그런 앞뒤가 안 맞는 제도와 현실과 목표가 전혀 합치가 안되는 게 큰 문제인 거죠.
함 : 선생님 말씀은 그러니까 건축이 인문적 깊이와 품위를 가지려면 기술의 측면만 강조하는 현행 공과대학 시스템이 아니라 건축대학으로의 독립 같은 방향을 통해서 디자인적 측면도 공부를 해야 하고, 실제 현행 건축가들이 교수가 되는 교육적 개입을 통해 종합적인 측면의 공부로 보강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신 거죠?
조 : 네, 그렇습니다. 사실 그래서 제가 1997년부터 10년 동안, 엄밀하게는 93년이에요. 1993년부터 10년 동안 서울건축학교라는 걸 그때 했었지요. 그게 바로 공과대학에서 건축학 교육을 못 시킨다, 건축교육은 시킬 수 있는데 건축가의 교육은 못시킨다. 디자이너를 못 기른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학교를 만들어 대학원 과정을 만들어서 한 10년 동안 학위를 못주는 대학 운영을 했었던 것이죠.
인문으로서 풍경
함 : 제가 ‘인문정신’과 관련된 대화를 하면서 인문이 뭐냐 질문을 받으면, 삶에 있어 여러 가지 관점이 가능하고 여러 가지 관점을 공존시킬 수 있게끔 하는 360도의 시선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손자병법>에 보면 전쟁을 할 때 제일 필요한 게 세 가지다 라면서, 우리 한글창제원리에도 천(天)·지(地)·인(人)을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서도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와 인화(人和)를 얘기합니다. 적절한 때가 있고, 지형이 전쟁할 때 굉장히 중요하고, 또 싸우는 당사자 주체들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런 여러 다른 시각을 융합시키는 게 바로 전쟁의 인문학일 겁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건축을 단순한 공학이 아니라 ‘인문적 집짓기’라고 제가 이해하고 있자니, 갑자기 손자병법의 저 관점이 떠오릅니다. 조성룡선생님의 건축이야말로 시간과 땅의 맥락과 그 공간 속 사람의 실제 생활을 늘 동시에 생각하시잖아요. 이게 <손자병법>에서 얘기하는 천시·지리·인화 아니겠습니까.
조 : 그 얘기를 위해서는 ‘건축가’라는 이름의 프로페셔널에 관해 먼저 잠깐 생각해 봐야 해요. 건축가는 면허를 가지고 있지요. ‘면허’라는 제도가 생겨서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다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직업이 다 면허주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면허를 가진 직업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 같은 직업, 또 어떤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법률가 같은 직업, 또 우리 같은 집 짓는 직업인으로서 건축가, 여기만 있는 거예요. 사람의 몸과 권리와 또 공간을 다루는 이 직업은 서양에서 생긴 시스템이긴 하지만 이걸 그래서 프로페셔널이라고 그래요. 그냥 직업이라고 그러지 않고. 그래서 건축가가 뭔가를 만들 때에는 겉으로 근사한 것을 만드는 게 아니고 기본적으로는 안전하고 좋은 것을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내가 좋은 걸 표현하는 게 아니라 쓰는 사람 편에서 좋아야 되는 게 기본이에요. 이게 기본이고 지금 말씀하신 여러 가지를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근데 사실은 저는 이게 인문정신의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쓰려고 뭘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뭔가 만들 때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죠. 배려도 해야 되고 뭐 실제 땅에 대한 것도 상당히 많이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에.
내가 아까 그 SA라고 하는 서울건축학교라고 하는 학교를 10년 하다가 그 다음에 한 5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좀 가르쳤어요. 그러다가 그 다음에 성균관대학교에 2008년에서부터 지금 한 10년 하고 있는데, 이 성균관대학교 오고서 그때 지금 작고한 정기용 선생하고 시작을 하면서 둘이서 한 얘기가 있어요. 뭔가 새로운 시스템으로 학교교육을 할 수 있지 않겠냐 라고 하면서 그때 결론으로 맺었던 게 뭐냐면, 학교가 10년만 존속이 된다면 학과 이름을 풍토·풍경·풍수학과로 하자는 거였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우리가 땅을 다루는 직업이면서도 땅에 대한 공부를 우리는 너무 안한다. 그러니까 기후나 땅의 모양이나 지형이나 지세나 그런 거에서 기본적으로 뭔가 바탕이 되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한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도시화가 되니까 도시는 그냥 평평한 걸로 생각하고, 그냥 필지로 나눠지는 지적도로 나눠지는 어떤 땅에다가 집을 짓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데 땅이 그게 아니다 이거죠. 원래 우리 땅은 평평하지 않다, 대동여지도를 봐라. 여기 구불구불 완전 울퉁불퉁한 땅에 크게 보면 다 울퉁불퉁인데 자기 것만 보니까 그냥 평평한 거예요. 부분적으로 보니까. 그래서 전체적으로 울퉁불퉁한 지형 속에서 거기서 생기는 여러 가지 기후 문제, 날씨, 사실은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이 지형 때문에 미기후가 굉장히 발달되어 있어요. 마이크로 클라이미트(microclimate)라서 우리나라 전체가 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여긴 비 오고 산 넘어가면 비 안오고 이런 거죠. 그래서 그게 지형 때문에 생기는 거거든요. 이렇게 우리가 집을 짓는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될 사항이 굉장히 많은데 그게 거의 그냥 일반화되어 있다는 거죠. 난방하고 냉방만 잘 하면 돼. 그러니까 기술과 기계로 전부다 해결하려고 하는. 집도 그게 가능한 시대니까 쉽게 그렇게 가는 거죠. 그게 아니라 원래 이 땅은 어떻게 생긴 땅인가 연구하고, 그 바탕 위에서 기후와 날씨와 뭐 이런 걸 맞추려고 하고, 그러면 어떻게 지어야 되는가 출발부터 고민하게 되는 거죠.
함 :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집에 살 사람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게 인문정신이 깃든 건축의 기본이라는 말씀은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건 건축을 건축가의 예술적 표현으로서 보는 관점과도 확실히 다른 관점인데 단순하지만 감동적인 관점인 것 같아요. 또 땅의 지세부터 다시 점검한다는 말씀은 전제부터 다시 점검하고 고려해보는 관점이라는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사실 콘크리트로 덮여 있어서 그렇지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은 평평한 게 아니잖아요. 당연한 생각인데 그 생각을 하기가 또 쉽지가 않네요.
조 : 제가 이런 것을 조금 생각하게 된 게 일본의 1930년대 어떤 지리학자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풍토(風土)’가 뭐냐. 우리는 이 풍토는 얘기를 안 하는데... 그래서 거기서 나오는 얘기가 일본은 몬순지대에 속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중해 기후하고 다르고 사막의 기후하고도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 이렇게 집을 지어야 된다, 하더라고요. 일본이 어떤 기후대에 속해있나. 그렇기 때문에 어떠어떠한 생활과 어떤 문화가 생성이 됐는데, 그것은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특성의 차원에서 구체적이고 다르게 생각해야 된다, 하는 식이었지요. 그래서 전 ‘그렇지, 기후라는 게 중요하지.’ 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몬순이라는 건 우리가 중학교 때 다 배워요. 문제는 배우는데 그게 삶과 아무 상관없는 정보로 끝나고 만다는 거예요. 우리 교육이 지금 다 그런 식이지요. 그래서 건축의 경우도 우리 삶의 실재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냥 추우면 난방 잘 할 수 있게 만들고, 더우면 에어컨 틀고 그 다음은 다 틀어막고 해서 단열 잘하고 하면 좋은 집, 그런 식인데 ‘좋은 집’이라는 게 그게 다는 아니다 라는 거죠. 꾹꾹 틀어막으면 반대의 문제가 생기는 거잖아요. 통하지 않기 때문에 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한쪽 면으로 볼 수는 없다, 함선생님 말씀대로 360도 여러 각도의 관점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이지요.
그 풍토를 하면서 그 다음에 배우게 된 게 뭐냐면 ‘풍경(風景)’이란 말이에요, 풍경. 풍경은 너무 많이 우리가 배웠어요. 미술 배울 때도 풍경화. 옛날에는 사생(寫生)한다 그랬잖아요. 풍경은 서양에서 말하는 풍경하고 우리나라 풍경은 다르다, 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일본에 좀 있어요. 풍경이라는 말은 7세기의 두보의 시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풍경화라는 말을 안 쓰거든요. 산수화, 수묵화, 뭐 이렇게 하지, 풍경화라는 말은 안 써요. 서양에서는 분명히 풍경이라는 말이 랜드스케이프(landscape)와 같은 것인데, 특히 17세기 네덜란드 쪽에서 나온 그런 개념인데 그건 동아시아의 수묵화와는 많이 다른 것인 듯합니다. 동아시아의 경우 자연을 그린다고 해도 수묵화라는 게 눈에 보는 보이는 대로 자연을 그리는 게 아니고 관념적으로 그리잖아요. 멀리 있는 산도 가깝게 그려놓고. 두보의 시에서 보면 그 풍경이라는 단어를 쓸 때 어떤 동네의 모습을 풍경이라고 했어요. 그날은 굉장히 햇볕이 잘 쪼이는 기분 좋은 날이었고 어떤 동네의 경관을 풍경이라는 말로 표현 했지요.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거기서 자기가 오랫동안 못 만났던 사람을 동네에서 만났는데 그때 풍경이라는 단어를 쓴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풍경’은 단지 눈에 보이는 그것만은 아니고, 똑같은 금강산을 보더라도 누구하고 가서 봤는가에 따라 달라져보이듯이 사람이 또 개입이 된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프랑스의 지리학자 중에 오귀스탱 베르크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인데 그 분이 일본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일본에 와서 15년 살다가 거기서 연구를 해요. 일본에 대한 문화연구를, 지리학자인데 책을 써내요. 『일본의 풍경, 서구의 경관』이라는 책을 써요. 그 책을 보면서 두보의 시하고 연결해보니까 맞는 얘기인거죠. 동아시아에서는 랜드스케이프를 ‘경관(景觀)’이 아니라 ‘풍경’이라고 번역해야 된다, 이런 얘기였어요. 그런데 서양에서 경관이라는 것은 보이는 어떤 것을 그대로 사실적으로 혹은 르네상스시대부터 그랬다고 그래요, 영주들이 자기가 소유하는 땅을 약간 높은 데에 올라가서 쭉 보고 그걸 그림으로 그리면 그게 랜드스케이프라고 했다는 설도 있고요. 땅을 관리하는 개념에서 랜드스케이프 개념이 출발했다는 거죠. 그런데 풍경이란 동아시아에서는 그런 실제 경관하고 관련되어 있지만 어떤 사람하고의 관계, 기억, 이런 것들이 다 내포된 아주 복잡한, 그래서 이 ‘풍(風)’자 하고 ‘경(景)’자가 한자를 보면 ‘풍’은 위에 돛이 달려 있잖아요. 그리고 안에 곤충이 들어가 있어요. ‘충(虫).’ 그러니까 곤충하고 돛은 바람이 없으면 존재가 안 드러나는 거예요. 그리고 ‘경’은 보이는 거고. 해가 위에 있고 밑에 있는 것은 서울이고. 큰 도시의 해. 이렇게 해서 바람과 해가 관계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바람이라는 것을 저는 기후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기후와 어떤 기후에서 어떤 날씨에 보이는 어떤 것, 그게 바로 ‘풍경’이다. 풍경에는 날씨의 개념도 들어가 있고 그때 보이는 어떤 빛에 대한 것도 들어있고 뭐 이렇게 여러 가지가 들어 있다고 제가 지금 우기고 있는 거지요.
함 : ‘풍경’이란 말이나 풍토라는 말이나 그 개념이 복합적이고 따져볼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군요. 어떻게 보면 천·지·인이 그 개념 안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조 : 네. 아까 얘기한 천·지·인 개념에서 결국은 인문(人文)만이 아니라 지문(地文), 하늘하고 관련된 천문(天文),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복합적으로 홀리스틱(holistic)하게 생각하는 것이 건축에서는 맞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래서 결국은 집을 짓는다고 할 때, 옛날의 전통적인 땅이 아니고, 지금은 전부 기계사회에 맞게 또는 기계사회 이후에 도시가 커지면서 거기에 모든 조건을 맞추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흔히 집에 가면 ‘편안하다’ 고 할 때, 그게 뭔가 그 요소와 실체를 난 좀 찾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흔히 ‘집이 특이하다’, 유니크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그런 집과 건축물을 추구해요.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건 특이하다기보다는 좀 편안했으면 좋겠다. 사는 사람이 편안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럼 그 편안함이란 뭔가, 그걸 계속 찾으려고 그러는 거죠. 이게 쉽진 않습니다. 제가 지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 편안하다는 말을 하는데, 그걸 살펴보면 요소가 여러 가지가 있어요. 날씨 변화에 관계없이 들어가면 쾌적하다, 그 다음에 공간이 압도하지 않고 쾌적한 느낌을 준다, 빛이 하루 종일 돌아다닌다, 빛이 동쪽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해지는 동안에 집에 계속 이렇게 도는 거죠. 왜냐하면 창문의 방향에 따라서 빛이 계속 다른 쪽에서 들어오니까요. 그렇게 해서 그냥 잠깐 거기를 방문한 사람이나 이런 사람은 잘 못 느끼지만 하루 종일 생활하는 사람은 그걸 느끼게 되는 거죠 몸으로. 자기가 생활하면서 몸으로 느꼈을 때 편안한 것, 그게 건강한 집 아닌가. 그래서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프로페셔널로서 해야 되는 것은 그런 게 아닌가. 무슨 특별한 예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건 뭐 그 다음에 결과고, 해야 되는 게 꼭 예술일 필요는 없거든요. 저는 건축가를 예술가로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그런 프로페셔널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 그리고 그게 재산이거든요. 부동산에 관계있어요. 저는 집이 부동산과 관계없다고 안 해요. 내가 잘못지어주면 그 부동산 값이 뚝 떨어지는 거예요. 돈을 들여서 지었는데 원래 뭐 얼마를 지었는데 50퍼센트밖에 가치가 없다 그러면 그건 부동산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거죠. 그것도 전 해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을 해요.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프로페셔널이다
함 : 선생님이 지금 참 중요한 화두를 던지신 것 같아요. 건축을 흔히 건축가의 예술적 표현으로 이해하고, 어떤 유니크함의 추구를 건축가들이 우선 순위로 두는 데에 비해서, 집은 살고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편안해야 한다, 그리고 편함의 요소에 대한 이런저런 말씀은 삶의 실재가 결과적으로 ‘미학’이 되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미학 자체를 내세우는 건축과 디자인에 대한 관점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건축가는 프로페셔널이지 예술가가 아니라는 말씀도 그렇고요. 한국에서 요즘 건축가들이 지닌 예술적 자의식을 보면 선생님의 관점과는 다른 것 같은데 여기에 관해 생각을 더 말씀해주시지요.
조 : 물론 역사를 보면 서양이나 동양이나 예술적인 가치를 갖고 있는 건축이 있긴 하죠. 그런데 드물죠. 모든 건축이 예술일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차피 이 작업은 지금처럼 프로페셔널로서 작업을 하는 건데 그게 다 예술이 되어야만 되는 것도 아니고 예술이 될 수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 혼자 작업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의 협조와 협력과 노동에 의해서, 특히 타인의 협동노동에 의해서 집은 만들어지는 거죠. 그 사람들 중에 소수가 디자이너고 결국은 다수 노동자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집입니다. 게다가 지금 같은 현대사회에서는 건축가가 큰 파워를 가지고 집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관할할 재량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건축을 맡기는 오너가 있고 건축가의 설계를 실행하는 건설회사가 있지요. 옛날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으면 어마어마하게 부여받은 권력과 돈으로 다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거죠. 점점 사회적인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건축가는 이런 건축의 조건과 협동노동의 성격을 인정해야 하고, 그래서 건축을 건축가 자신의 독자적 예술품처럼 여기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많은 건축가들이 이런 지점에 대한 인식과 솔직한 인정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건축가는 중간에서 코디네이팅 해가면서 내가 좋은 것만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그 집에 사는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그런 가치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은 하는 거죠. 그런데 뭐 100퍼센트 창조성을 발휘할 수는 없는 거예요. 이런 전체적인 협업 과정이 어느 정도 맞으면 남들이 보기에 ‘어, 저 정도는 예술적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어도 내가 스스로 예술을 만들겠다고 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과로써 예술이 생길 수는 있겠죠.
함 : 건축가들 자신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지닌 ‘예술로서의 건축’이라는 관점은 저도 관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점인데요, 그건 아마 건축이 지닌 조형적 요소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건축이라는 게 집단적 협업의 과정이고 하나의 건축물이 실현되는 사회적 조건이나 프로세스가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도 따지고 보니 나이브할 뿐만 아니라 삶의 실재와 분리된 직업적 환상이라는 게 분명해지네요. 그렇다고 한다면 건축가들이 가진 예술로서의 건축이라는 관점이나 예술가로서의 건축가라는 자의식 같은 것도 다시 재고해봐야 할 지점이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건축과 조각의 차이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고, 실용성이 결부된 디자인적 실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도 참고할 만한 중요한 말씀이라는 생각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면 요즘 어떤 학문이나 분야나 젊은 세대 전문가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서양이론이나 이런 걸 가지고 얘기하시는 게 아니라 늘 우리 삶의 실제 상황, 살아왔던 시간과 공간의 이력을 살펴보며 거기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시는 게 인상적입니다. 실사구시적이면서도 늘 이미 융합적이라고나 할까요.
조 : 실제로 그런 면이 있기는 한 것 같아요. 늘 내가 살아온 경험, 우리가 살아온 경험을 잘 살피고 거기에서 배워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죠. 집도 자기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경험을 성찰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저는 멋있는 집은 아니지만 일반 사람들이 살아왔던 집단적 거주의 경험에서 많이 배웁니다.
예컨대 요즘은 옛날의 집들, 한옥 같은 구조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어요. 요즘과는 달리 예전에는 중간세대, 할아버지 그다음에 손자세대, 이렇게 3세대가 같이 살았잖아요. 특히 6.25때는 처음에 피난을 가서는 요만한 방에 그냥 일곱 식구 3세대가 다 피란 때니까 그렇게 저는 살기도 했는데, 그때 집에 할아버지가 중풍을 앓으셨어요. 중풍 환자가 피난 다닌다는 게 엄청 힘들죠.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가족들에게 힘들게 하시기도 했어요. 집은 좁고 그런데 불편해도 같이 살아야 되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살았는데 그런 것들이 그땐 그냥 불편하다고만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봤더니 어쩔 수 없이 3세대가 살면 집이 넓어도 불편하게 되어 있는 거예요. 옛날에는 뭐 집이 좀 넓어도 같이 살면 불편한 거예요. 그런데 이런 거죠. 할아버지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기침소리가 좀 이상해. 약간 좀 끓는 그런 소리가 나면 할아버지 상태가 안 좋구나, 이걸 며느리가 제일 먼저 알아챈다는 거예요. 누구보다도. 왜냐하면 제일 신경을 많이 쓰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러면서 생각을 하는 거죠. ‘아, 우리 시아버지가 오늘 아프구나, 많이 건강이 안 좋구나.’ 그런데 그건 집 구조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알게 되는 면도 있다는 거죠. 다 들리게. 별로 이렇게 칸 막고 하는 게 많지 않았고. 그런데 그게 못 막아서 그런 게 아니라 미닫이문이라는 게 기밀성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다 들려요. 저 끝에 떨어져있어도. 그러면 옛날에 그걸 못했겠냐. 우리나라 난방이라는 시스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명품이라고 그러는데 그걸 못했겠냐. 벽을 두껍게 쌓으면 되는 건데, 일부러 안했다는 거죠. 물론 그때 목조로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또 다른 뜻도 있겠지만 목조, 목구조의 불편함, 목구조의 모자라는 점을 다른 것으로 보강을 했을 텐데 안한 것도 굉장히 많다는 거죠.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아까 그 기후하고 관계가 되고 어차피 우리나라 집은 겨울에는 엄청 춥고 여름에는 엄청 후덥지근해서 이 두 가지를 맞출 집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예 대청 만들고 방 만들고 해서 겨울에 주로 지내는 곳, 여름에 지내는 곳, 이렇게 나누고 아예 이렇게 했는데, 또 칸도 이렇게 강하게 벽을 막는 게 아니라 열면 다 통하고 닫으면 또 적당히 이렇게 분리가 되는 그런 구조로 만들었던 것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저는 보는 거죠. 그러니까 어릴 때 경험으로 보면 늙은 할아버지 또는 병든 할아버지 목소리를 저 건넛방에서 들을 수 있다, 듣고 알아차린다, 이런 것들이 집에서도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걸 서양식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서는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생각하는 건 삶의 실재를 좀 잘못 이해하는 거라고 봐요. 한 집안에서도 기밀성이 중요하게 되고, 그렇게 집을 짓고, 요즘 문제되는 층간소음 개념도 그렇죠.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요즘은 적대적인 거예요, 공동의 삶에 대한 오해에 기초해 있고요. 가족 안에 프라이버시가 뭐냐, 그러면 우리가 다 큰 딸이 지금 중학생인데, 그러면 중학생 딸 방에 들어갈 때 아버지가 노크를 하고 들어 가냐. 그런 가정도 있다 그래요. 미국영화를 하도 많이 봐서. 그런데 사실은 그거 아니잖아요.(웃음) 아니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마치 그게 선진화되고 그게 모범답안으로 지금 우리가 서양 것을 들여오면서 이렇게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벽을 전부다 두꺼운 벽으로 하고 문도 아주 두껍게 만들고 거기다가 열쇠도 다. 누가 딸 방에 열쇠, 언제 한번 잠가본 적 있나요. 집에서 딸이 열쇠로 잠그면 문제 있는 집안, 문제가 생긴 거죠. 그것은 그 안에 가족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거든요. 프라이버시라는 건 내가 좀 불편하면 내가 이렇게 닫으면 해결이 되는 거라야지, 완전히 이렇게 폐쇄시키는 건 아니다, 이런 개념을 보면 우리가 전통적인 그런 사회에서 보통 일반적으로 했던 집의 형태나 이런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지금 그것이 오히려 더 우리에게 필요한 개념 아닌가, 그런 생각도 많이 해요.
그래서 오히려 요즘 현대적인 설계일수록 벽을 많이 제거하는, 필요에 따라서 벽을 할 수 있는데 열면 다 통하는 이런 것들이 많이 생기는 것도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프라이버시라는 것은 자기가 지키는 거지, 프라이버시를 처음부터 확보할 필요는 없다 하는 거죠. 일본 아파트도 보면 집 구조가 우리보다 훨씬 더 포용적이에요. 앞에 있는 다른 집하고 거리가 한 6미터밖에 안 떨어져있어요. 사실 문 열면 다 보여요. 그런데 왜 그렇게 짓나. 어차피 고밀도로 도시에서 지으려고 그러면 그렇게밖에 지을 수 없는데, 그걸 서로 인정하자는 거죠. 내가 닫으면 될 것 아니냐 서로가. 보통 때야 뭐 그거 열어놔도 되는 거고. 그래서 커뮤니티를 계속 지속시키면서도 필요할 때는 닫을 수 있게 해나가는 건축가들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너무 급하게 빨리 없애버린 거예요. 우리는 무조건 프라이버시 차원,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그래서 앞집의 차만 보이면 난리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거거든요. 그래 가지고 옆의 집하고 사귀겠어요. 집만 지으면 계속 그것 때문에 분쟁이 생기는 것, 이런 것들이 전통이 넘어오면서 우리가 잘못 학습되거나 잘못 인식하게 되는 문제 아닌가. 그건 집만이 아니고 도시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까 길도 서양에서 발달된 어떤 도시의 길하고 우리하고 좀 다른 게 있거든요. 골목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건 어차피 뭐가 좋다 나쁘다 개념이 다른 거예요. 다른 것을 우리식으로 다시 한 번 좀 더 탐구를 한 다음에 나왔어야 되는데, 서양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그냥 전부다 답으로 가지고 오게 된 것이 이제 건축교육에서도 큰 문제점인 거죠. 우리나라 건축론이라는 게 지금 없으니까. 전부 서양 것을 가져온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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