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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4-21 09: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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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ways of seeing] 잠실의 탄생과 아시아선수촌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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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3월 통권 047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1회] 잠실의 탄생과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조성룡
건축가. 1944년 생. 인하대 건축과 및 동 대학원 석사.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의재미술관, 소마미술관, 선유도공원 등 소수의 건축물을 설계했다. 서울건축학교 교장을 지냈고 지금 성균관대 명예석좌교수로 있으며, 한국 최고의 건축물 20에 가장 많은 작품이 뽑힌 건축가이기도 하다. 2회의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서울시문화상, 김수근건축상 등을 수상했다.
※ 인터뷰 및 정리: 심세중(수류산방 대표)






[100층의 마천루와 아래로 꺼지는 싱크홀이 나란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울의 동쪽, 잠실은 석촌호수와 아파트들이 있는 곳이고, 올림픽 경기장과 공원이 있는 곳이다. 그 공원 너머에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도 있다. "1986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하는 선수 임원의 숙식과 위락 공간을 제공하고 대회 종료 후 시설의 지속적인 활용을 고려하면서 역사적 기념물로 영구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으로 건설된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는 우리 나라 아파트로서는 최초로 국제 현상 경기를 거쳤던 단지였다. 마치 "아파트"로 상징되는 주거 문화가 한편으로는 오로지 추구해야 할 삶의 지표였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건 집도 아니지 않느냐며 건축가들이 질시하는 동안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는 조용하게, 그러나 "아파트도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보여 주며 서 있었다. 건축가 조성룡은 무명의 젊은 시절 이 현상 설계에 당선되었고, 30년째 자신이 지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진. 아시아 선수촌 초기 모형. 1983년.)

   잠실, 모래 위의 도시
   "종합운동장, 선수촌, 공원이 서 있는 곳이 옛날엔 강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한강이 되고 비가 적게 올 때는 모래톱이 드러나요. 한강이 갈라지면서 모래섬이 두 개 있었어요. 하나는 잠실섬이고 하나는 부리도예요. 잠실(蠶室)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뽕나무가 울창하고 양잠, 누에를 기르던 곳이고, 조선 시대에는 누에를 천충(天蟲)이라고 귀하게 여겨서 왕실에서 직접 잠실을 관장했는데, 서울에 잠실은 세 군데 있었습니다. 서대문구 연희동 일대가 서잠실, 광진구 자양동 잠실섬 일대가 동잠실, 그리고 서초구 잠원동 쪽이 나중에 생겨서 신잠실이라고 불렸습니다. 부리(浮里)는 뜬마을, 떠 있는 마을이에요. 한강에 떠 있는 마을이었다가 비가 오면 없어지고… 우리말로는 부렴 마을입니다. 아직 비석이 있어요. 지하철 역에서 나오면 아파트 입구에 비석이 서 있고 그 마을 살던 사람들이 거기서 1년에 한번씩 제를 지냅니다. 섬 때문에 한강 줄기가 갈라지는데 한쪽은 신천강(새내), 또 하나는 송파강이라고 했습니다. 조선 조정이 중국 청나라 군대 피해서 남한산성 갈 때 송파를 지나서 가잖아요. 신천강이라는 이름은 지금 신천동으로 남아 있고, 송파 쪽은 석촌호수로 남아 있어요. 석촌호수는 송파강이 다 안 빠지고 남은 물이에요. 그래서 잠실이라는 곳은, 자체가 완전히 모래톱 위에 서 있는 아파트촌이예요."


(사진 : 1960년대의 송파)
   1980년대의 마약
   "1973년쯤에 잠실 지구 종합 계획이 나옵니다. 공유 수면을 매립해서 강의 남쪽에 340만 평의 땅을 만드는 겁니다. 그 때 강을 메꾸면서 마을을 이주시킵니다. 새마을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부리도 마을 주민들은 오랜 생활 터전을 떠나야 했습니다. 지금은 잠실동이니 신천동이라는 동네 이름마저 지형과 지역의 유래를 무시한 새주소 시스템 때문에 희미해져 버렸고요. 처음에 종합 운동장은 올림픽 스타디움이 아니라 그냥 운동장이었습니다. 동대문은 야구장 전용으로 하고 축구장을 가져오겠다는 계획이었는데, 그리고 5.18이 터진 거지요. 전두환 씨가 집권을 하면서 욕을 먹으니까 갑자기 올림픽을 유치하는 겁니다. 기업인들을 죄다 내보내서 올림픽을 유치하고, 올림픽을 잘 할 수 있는지 검증을 해야 한다느니 해서 또 아시안게임을 유치한 거지요. 80년대에는 86, 88이 아예 이념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로 축구, 프로 야구를 만든 거죠. 10년 동안 마약을 먹인 거예요. 국민들을 위로한다고 자기를 합리화시킨 거죠."
   최초의 아파트와 모던 리빙의 환상
   "그 전에도 조금은 있지만 나라에서 지은 최초의 아파트가 1963년에 주택공사에서 지은 마포아파트인데, 준공하는 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나와서 치사를 해요. 그 내용이라는 것이 이게 우리가 바라던 생활의 핵심어야 되고, 앞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 좋은 삶이라는 그런 뜻이에요. 지금 읽어 보면 아,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요즘도 비슷하더라고요. 정치하는 사람이 물질의 스탠더드를 정해 버리는 거죠. 정신적인 지향이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본보기를 드러내는 겁니다. 마포아파트는 두 단계로 지어집니다. 처음에는 Y자 모양으로 지었다가 나중에는 그 바깥쪽에 一자로 짓죠. Y자라는 형태가 우리 나라 기후에는 맞을 수 없는데, 아마도 유럽 근대 도시에서 등장했던 주거 이론을 그대로 따온 것 같습니다. 그 외형에 대한 일반인들의 쇼크, 그리고 내부에 설비가 잘 되어 있어서 늘 따뜻하고 늘 더운 물이 나오는 그런 생활에 대한 동경. 마포아파트는 연탄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모던 리빙에 대한 비전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아파트 주변으로 전쟁 후에 복구되고 있던 서울의 모습이 펼쳐지는데, 그 맥락과는 전혀 닮지 않은 아파트를 지은 겁니다. 그리고 울타리를 치는 겁니다. 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이른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가 탄생하는 거지요."
 
(사진 : 1963년 완공된 마포아파트. 해방 후 최초의 아파트로 기록되나 처음에 보통 사람들은 생활이 불편하다며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기형 도시, 강남의 탄생
   "아파트의 발생하고 강남 개발은 맥락이 좀 다릅니다. 여의도에 윤중제 쌓으면서 갑자기 큰 땅이 생겨난 것을 보고 김현옥(金玄玉, 1926~1997년) 서울 시장이 강남 개발에 눈을 뜨잖아요. 처음에는 영동 개발이라고 했습니다. 영등포의 동쪽이라 해서요. 반포 아파트 세우고 잠실도 메꾸고 압구정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건 도시가 아니야.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강남으로 건너 오면 한남대교 하단에 가게들이 몰려 있고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초원에 텐트처럼 띄엄띄엄 집이 있다가 강남역 근처 오면 다시 바글바글해요. 강남역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서초역, 왼쪽은 역삼역 쪽으로 뻗으면서 뭔가가 생겨가요. 그 때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게 모텔과 안마 시술소, 그리고 룸살롱이예요. 집도 빌딩도 하나 없는데, 그런 것만 쫘악 있는 거예요. 이게 점점점점 이어지며 삼성역까지 오다가 탄천에서 끊어지거든요. 모조리 길이예요. 리니어 시티인 겁니다. 기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강북에 있는 학교를 이전시키지요. 8학군 만든 게 결정적으로 강남에 사람들이 오게 된 계기잖아요. 한국 사람들, 이 교육열. 8학군만 잡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강남이 생기고 그게 잠실까지 뻗는 거예요.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가 개관하기 2년 전인가, 지하철 2호선 순환이 완성됩니다(1984년). 내용인즉슨 강남의 시티 센터(부도심)를 잠실로 끌고 온다는 거예요. 체육관이니 운동장은 그 핑계가 되었어요."

(사진 : 1970년 영동 개발 당시의 강남)
   이벤트 도시와 강남 3구의 형성
   "그들의 목적은 '거대한 체육 콤플렉스와 선수촌'을 하나의 세트로 해서 '이벤트 도시'를 만들려고 했던 거니까, 상당히 기념성과 상징성을 요구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아시아 대회가 실패한다면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가 어렵겠다, 선수들나 국가가 많이 참가하지 않을 거라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대회에 오히려 올림픽보다 총력을 기울입니다. 운동장이야 운동 시설 기준대로 어떻게든 하면 되는데, 선수촌은 사람이 거주하는 데니까, 테러라든지 안전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보장하는가, 그것이 제일 우선하는 과제였습니다. 뮌헨 올림픽(1972년) 때 사고가 났잖아요. 설계 끝나자 마자 정보부에서 설계 도면 원도를 몽땅 가지고 가 버렸어요. "테러 방지". 정보가 새어 나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중에 돌려줄 줄 알았더니…. 선수촌의 두 번째 과제는 한국 사람들도 모던 주택에 산다는 것을 선전하는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설계할 때 제가 그런 맥락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습니다. 아시아 선수촌 설계할 때만 해도 강남3구 같은 말이 없었어요. 탄천의 이쪽은 모조리 강동구였습니다. 그런데 강남을 잠실로 끌어 와야 하는 거잖아요. 올림픽을 하면서 송파구로 바뀝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강남이라고 생각해요."
   합동 재개발과 도시 주거
   "아파트가 범람하게 되는 배경과 관련해서는 1983년이라는 시기가 조금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지하철 2호선 이야기도 했지만 이 무렵에 서울에서 도시의 중요한 기간 시설들이 깔리기 시작하거든요. 그것이 어떻게 깔렸느냐 하면, 합동 재개발방식이라는 것이 시작되거든요. (가옥이나 토지의 소유자가 조합을 구성해 자율적으로 주택 재개발을 시행하는 방식이다. 자금과 시공은 자격을 갖춘 주택 건설 사업자가 제공한다.) 우리 나라 아파트가 지금 이런 형태로 고착되는 시작이에요. 합동이라는 의미는 "민간과 합동"을 줄인 것입니다. 불량 주택지를 해체(slum clearance)하는 재개발 사업을 민간에서 할 수 있게 만든 겁니다. 말이야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민간이 필요로 하는 대로 자율적으로 하라는 건데, 국가에서 응당 해야 할 재개발을 정부에서 손도 안 대고 하는 거죠. 도시에는 기반 시설이 필요한 법인데,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도로니 상하수도 전기 설비 같은 모든 인프라의 비용을 민간이 대게 만든 겁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 때부터 아주 대대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집니다. 건설 회사, 아파트 회사가 비대해지고요. 인프라를 자기들이 투자해서 만들었으니 그 주변에 자기네 단지를 더 확장시키려고 안간 힘을 쓰는 거죠. 그 피해가 지금까지 오는 거잖아요. 그렇게 주택을 공급하던 시대에 아시아 선수촌은 그나마 정부가 한 거죠. 어떻든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최초의 국제 설계 경기 심사 과정 공개
   "아시아 선수촌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제 설계 경기 중 하나였을 겁니다. 국제 경기를 두 단계로 했습니다. 1단계에는 30군데 정도가 응모를 했는데 그 중에 우선 여섯 개 안을 등수 없이 뽑아요. 2단계에서 본선으로 여섯 개를 다시 붙이는 거야. 여섯 명이 뽑혔는데, 그 때 희한한 걸 했어요. 심사표를 공개한 겁니다. 누가 어디 찍었는지를요. 여섯 사람 안도 다 공개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안이 다 공개된 상태에서 2단계 심사를 하는 거예요. 그 때부턴 엄청난 로비가 들어가는 거지요. 2단계는 심사위원이 열 여덟 명인데, 2등하고 십대 팔로 이겼어요. 심사위원 중에 두 사람이 외국 출장을 가서 못 들어왔어요. 그 두 사람이 반대 편이었는데요. 어려운 게임을 한 거지. 그렇게 해서 된 겁니다. 기명 투표의 심사표와 심사 과정을 잡지에 다 공개한 겁니다. 이런 공모를 그 때 한 번 하고 이후로는 안 하는 거예요. 그게 83년인데, 전두환도 그런 걸 용납하는데. 그때는 속사정을 몰랐어요, 그저 당선이 되었으니까 신났을 뿐이었죠. 독립 기념관, 예술의전당, 국가 프로젝트들이 줄줄이 있었던 무렵이었습니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그 쪽에 전부 달려든 겁니다. 아파트 같은 건 관심을 두지도 않았던 거예요. 나같은 무명 신인이 당선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아시아 선수촌입니다."
   개미들
   "아시아 선수촌 공모의 조건은 공원을 함께 설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강 위에 세운 메인 스타디움 남쪽에 땅 10만 평을 주고서는, 공원 2만 평을 넣고 아파트 5만 평, 그리고 초등학교하고 중학교를 넣어라, 그게 조건의 전부였습니다. 각각의 위치는 어디에 끼워 넣어도 상관 없어요. 그런데 이 대목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 때 삼성동 쪽은 완전히, 비어 있었어요. 집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남쪽도 거의 비어 있었어요. 당시에는 꽤나 잘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풀어내지 못한 게 있었어요. 그게 문정동 방향입니다. 아시아 선수촌에서 시작해서 잠실 주공 거쳐서 장미아파트까지 아파트 블록이 주욱 이어져요. 전부 아파트인데, 그 아래 블록은, 지금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전부 개미야. 물론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주택지로 지정이 되어 있었지요. 그 때는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되어서, 상상도 못 했어요. 이게 슬픈 겁니다. 여기, 이 개미들.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있다고요. 무슨 얘기냐 하면, 설계 경기에 출품한 30개 안 중에 주변 블록들과의 관계를 고려한 안이 단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나마 나는 기껏 문을 사방으로 네 개를 낸다는 게 전부였습니다. 나름대로 주변하고 소통한답시고요. 다른 안은 그것조차 없어요. 내가 패착을 한 것이, 공원을 지금의 위치(북쪽의 스타디움과 아파트 사이)에만 할 게 아니고, 남쪽 주택 쪽에 일부 공유할 수 있도록 나누어 두었어야 했던 거예요. 그렇게 했다면…."
   아파트가 작은 마을이 될 수는 없을까
"그나마 조금 자랑하고픈 건, 동들을 니은자 모양의 클러스터로 만들어서, 일종의 작은 동네 단위로 나누었다는 겁니다. 이 아파트는 1,400세대나 되는 대규모 고층 단지입니다. 단지가 너무 커서, 여덟 개의 작은 마을로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 판상형 아파트에서는, 만약에 두 동 사이에 주차장이 있다고 해도 한 동이 앞(남쪽)으로 들어간다면 다른 동은 반대편(북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 동네 산다는 느낌이 쉬 들지 않는 거지요. 아시아 선수촌에서는 마주보는 각 클러스터들이 가운데 있는 주차장을 반드시 같이 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클러스터 안에다 작은 세대부터 넓은 세대를 다 나눠서 배치했습니다. 일종의 소셜 믹스인 거죠, 어떻든 주차장까지는 평수 불문하고 다 같이 들어가야 된다는 것. 한쪽은 동남향이고 다른 쪽은 남서향이니까 해는 반씩 들어가는 거고요. 배치의 힌트는 당시 잠실 주공 2단지의 방향을 참조했습니다. 층은 일률적으로 하지 않고 9층부터 18층까지 여러 높이로 되어 있습니다. 설계 공모 발표가 나고 나서 남한산성에 올라가 보았어요. 한강 너머로 서울을 이루는 삼각산과 아차산 능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산세를 의식해서 한 동에서도 아파트 높이를 단조롭게 하지 않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게 했어요. 가끔 엘리베이터 두 대로 어떤 층은 9층까지만 공유하는데 왜 자기네는 18층까지 써야 하냐, 그런 항의를 하는 주민들도 있습니다."
   외부 공간의 질서 : 느티나무 마당이 있는 마을
   "단지 안에 하루 종일 있는 사람들은 노인네나 아이들이나 여자들거든요. 그 사람들이 단지 안에서 안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아파트 안에서 차하고 사람하고 섞이면 안 되잖아요, 차는 단지 가운데를 관통하는 차도로 빠져 나갑니다. 아파트 건물 1층에 집을 채우지 않고, 빈 공간(필로티)으로 띄웠어요. 사람들은 필로티로, 동 사이를 관통해서 걸어 다니는 거예요. 찻길과 마주치지 않고도 공원까지 단지 안을 한바퀴 돌 수 있도록 한 개념입니다.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길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집 바깥의 공간이 실내보다 더 중요한데, 그랬을 때 외부 공간이 어떤 질서를 가져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아파트의 질서는 일자형 동들의 반복이 아니라, 길과의 관계로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차장과 주거동 사이에는 널찍한 마당이 있습니다. 주민들이 함께 이용하는 외부 공간의 구실을 하는 생활 마당입니다. 동과 주차장 사이가 이렇게 넓은 아파트도 없지만, 간혹 비워 둔다고 해도 들어갈 수 없는 풀밭이란 말이에요. 마당에는 키 큰 느티나무를 여러 개 심고 그 아래 벤치를 두었습니다. 옛날에 마을 입구에 정자나무 있고 그 아래 할아버지들 앉아 계시지요. 처음에 입주를 하니까 주민들이 불평하는 거예요. 아니 아파트라면서, 아파트 사는 내가 왜 주차장서 차 대고 집까지 왜 걸어야 하냐, 비 맞는데. 반상회를 가면 맨날 야단맞는 거예요. 그 소리는 나중에야 없어졌어요."

(사진 : 준공 당시의 필로티 부분. 아이나 노약자들이 자동차를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안을 자유롭게 보행할 수 있다. 멀리 보이는 조형물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입구다. 아시아 선수촌은 최초로 지하 주차장을 계획한 단지다.)

   아파트에 대한 고민 : 삶과 죽음을 담는 집
   "전에는 초상이 나면 이 마당에 차일 치고 노제를 지내곤 했어요. 집이라는 게 사람이 나서 죽는 곳이라야 하잖아요. 아파트에서 그것을 담을 수는 없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안쪽 벽을 열면 관을 싣고 내려올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운구를 할 때 관을 세워서 내려올 수 없잖아요. 그 전에 아파트에 살면서 초상을 세 번 치르고 보니까, 이런 문제를 알게 되었어요. 아, 내가 언젠가 아파트를 짓는다면 이것은 해결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렇게 해서 집에서 장례 지내고, 1층에서 노제 지내는 집들이 더러 있었는데, 90년대 중반 지나면서 슬슬 없어졌어요. 애초의 설계안은 편복도였습니다. 모든 층마다 복도가 있는게 아니라 세 층마다 하나씩 복도를 두고 한 집은 위로 올라가고 한 집은 아래로 내려가는 복층형으로 설계했어요. 서울시에서 이렇게 하면 분양이 안 된다고 거부하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계단식으로 바꾸어야 했는데, 계단식이라도 좀 다르게 해 보려고 했습니다. 집 현관문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완만하게 경사진 긴 복도를 두었습니다. 프라이비트한 공간(집안)과 퍼블릭한 공간(외부) 사이에 세미프라이비트한 공간을 삽입한 겁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아래층과 위층이 한꺼번에 보여요. 두 개 층쯤은 서로 눈길이나마 마주보고 교류하는 관계를 만들어 주려고 했습니다. 집에서 나와서 이만큼 걷는 그 경험이 굉장히 달라요. 이렇게 복도를 길게 둔 까닭도 관을 문 밖으로 운구하기 좋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 준공 당시의 아파트 엘리베이터. 반원형으로 길게 튀어나온 부분은 장례 때 관을 넣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파트 평면에 대한 도전 : 모던 리빙이라는 환상
   "강남이 생기면서 또 중산층이라는 게 생기잖습니까. 그 중산층들이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내부 구조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거실하고 식당이 붙어 있어서 들어가면 널찍해 보여야 하죠. 홈 드레스 입은 주부들이 비싼 그릇에 음식을 내 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집은 부엌이 중간에 있고 식당을 북쪽 창가로 냈어요. 가족이 밥 먹으면서 북쪽 삼각산 능선 풍경을 즐기라고 그렇게 했어요. 거실하고 부엌을 분리해 놓으니 손님들에게 과시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른바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슬슬 들어올 때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실제로 그런 생활하는 가족이 얼마나 있다고, 은밀한 부부 관계에 대한 환상이 생긴 거예요. 안방에 드레스룸이라는 게 붙어 있고 거기를 통해서 화장실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 안에 또 침실이 있는 구조 말입니다. 집 안에 스탠드 바까지 넣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게 당시 중산층이 생각하는 모던 리빙이고, 아파트에 가면 그런 모던 리빙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아마 건설 회사가 그런 환타지를 만들고, 팔아 먹었겠죠. 대리석을 깔고 벽에 몰딩하고… 그게 뭐냐면 룸살롱 인테리어였습니다. 이 분화된 중산층이라는 사람들이 주로 룸살롱 드나들던 사람들이고, 집에 대해서는 생각이라고 해 본 것이 없는 사람들인데, 훌륭한 인테리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게 그런 이미지인 거죠. 그 환타지를 부수는 게 엄청나게 어렵더라고요. 이건 개인 주택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사는 공동 주택인데, 누구 기준에 맞춰서 인테리어 장식을 하겠어요. 집 안에 장식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 이건 집도 아니다, 불평이 많았죠."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오늘
   "처음에 이 아파트를 설계할 때 단지로 드나드는 입구(게이트)를 사방에 네 개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그 중에 두 개의 문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주민들이 반대해서 폐쇄한 겁니다. 문을 많이 뚫어 놓으니까 다른 동네 가는 놈들이 단지 내로 관통해서 지나간다는 거야, 그게 싫은 거야. 우리가 관리비 내는데. 쓸쓸한 거죠. 다른 집들로 통하는 길쪽은 어떻게든 다 막아 버리는 거야. 그걸로도 모자라서 담장에다 철조망도 쳤어요. 담을 낮게 했더니 그 위에다가 철조망을 쳤어요, 지금까지 그런 상태예요.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게 실패를 한거, 너무 슬퍼. 만약에 이 아파트를 재건축한다면 우선 담부터 허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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