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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5-04-21 10: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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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ways of seeing] 어쩌면 우리의 처음이고 마지막일지 모르는,소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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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통권 048호 | 사람과 글 人ㆍ文

[제2회] 어쩌면 우리의 처음이고 마지막일지 모르는, 소마미술관



 

조성룡
건축가. 1944년 생. 인하대 건축과 및 동 대학원 석사.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의재미술관, 소마미술관, 선유도공원 등 소수의 건축물을 설계했다. 서울건축학교 교장을 지냈고 지금 성균관대 명예석좌교수로 있으며, 한국 최고의 건축물 20에 가장 많은 작품이 뽑힌 건축가이기도 하다. 2회의 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 서울시문화상, 김수근건축상 등을 수상했다.
※ 인터뷰 및 정리: 심세중(수류산방 대표)



 





 


 

   [그곳을 처음 간 것은 카페 때문이었다. 탁 트인 공원의 데크에 앉아 있으니 일에 찌들린 마음이 절로 풀리는 것 같았다. 슬슬 잔디밭을 걷기도 했다. 이런 데 미술관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대낮에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또한번 놀랐다. 점심 식사 후 산책 나온 직장인과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과 산책 나온 동네 노인들. 보통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별 대단한 미술관은 아님이 틀림없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해 보면, "정말 좋아요!"라는 애정어린 게시글들이 사진과 함께 줄줄 쏟아진다. 2004년에 개관한 올림픽공원의 소마미술관(SOMA)은 기가 막힌 전시 공간이 있다는 입소문으로 문화계에 겨우 이름을 알렸고, 그보다 먼저 동네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이 100개가 넘는 서울에서, 동쪽 끄트머리에 엎드린 작은 미술관이 별 무게를 가질 리야 있을까마는 지금 우리에게 이곳, 올림픽공원의 소마미술관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소마 미술관 초기 모형. 사진 김재경.]
 
 
   문화가 있는 삶과 어떤 불가사의
   "그런데, 그거 이상하지 않아요? 서울 강남에 공공 미술 공간이 없어요. 강북에 문화 공간들이 몰려 있으니 굳이 불필요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강남은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이지 않아요? 돈이 많고 사람도 많고 학교도 많은 지역, 그런 공간을 누릴 만한 대상도 확실하고 투자할 예산도 확보할 수 있잖아요. 기껏 서초 예술의전당밖에 없습니다. 예술의전당은 성격이 지역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올림픽 때 문화예술축전 행사장이었고요. 서울 전체로 보아서, 아마 시민들에게 가까워진 공공의 미술 공간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처음일 겁니다. 사실 서울이라면 구립 미술관쯤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예요? 서울의 구라는 것이 지방의 시보다 훨씬 크고, 유럽의 어지간한 도시하고 맞먹는 규모입니다. 불가사의한 일이야. 땅값이 비싸서? 아파트 짓느라고? 아파트 생길 때마다 체비지도 얼마나 많이 발생하는데 말입니다. 그건 어떤, 문화적 자존심하고도 관계가 있는 겁니다. 그나마 2000년대 들어서야 송파에 소마미술관 하나 생겼다는 게 말이 아닌 거죠. 소마미술관을 한창 짓는 도중에 바로 앞 아파트 주민들이 미술관 짓는 데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신문에도 크게 났어요. 자기네 아파트 앞에 좋은 공원이 펼쳐져 있는데 거기다 미술관을 왜 짓느냐, 고층 아파트에 플래카드를 내려뜨리고요. 집 근처의 미술관을 반대한다는 게… 그런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편편하던 곳에 무언가 들어선다고 하면 높은 곳에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무조건 반대하고 나서는 것, 우리의 어떤 단면이죠."
  
 
   잔치가 끝난 다음
   "소마미술관은 올림픽이 끝나고 거의 15년 후에 올림픽공원에 세워진 미술관입니다. 이 미술관은 이름부터가 서울 올림픽 미술관이었고, 지금의 소마는 그 이름을 영어로 바꾼 것(SOMA, Seoul Olympic Museum of Art)입니다. 올림픽을 소개하는 박물관도 아니니, 기묘한 이름이지요.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올림픽 공원과 그 안에 다섯 개의 경기장이 생깁니다. 체조, 역도, 펜싱, 자전거(벨로드럼), 테니스. 잠실경기장이 메인 스타디움이라면 올림픽공원은 근대 5종 경기를 중심으로 한 특정 종목의 경기장이 모인 셈인데, 갑작스럽게 시설이 늘어난 거지요. 그런데 올림픽 공원을 조성하면서 경기가 끝난 다음에 이 시설을 어떻게 사용할까에 대한 문제를 간과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시아선수촌을 설계하면서 1984년에 뮌헨에 견학을 갔더니 뮌헨 올림픽 경기장을 맡고 있던 독일 공무원들의 조언이, 올림픽을 치르느라 경기장 두 개를 지었는데 대회가 끝나고 나니 유지 관리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작 모터쇼나 하고 있지만 비용을 감당하기에 턱도 없는데, 듣기로는 서울에는 다섯 개를 짓는다니 큰 문제다, 부디 돌아가면 다른 방법을 고안하도록 설득하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거니와, 서울시에 전달했더니 하는 이야기가, 말하자면 다섯 개의 경기장이 하나의 카메라 프레임에 잡혀야 한다는 거예요. 그 결과가 다들 아는 것처럼, 올림픽 기념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엄청난 적자에 시달리게 되고 수익 사업에 열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본 올림픽 공원 5개의 경기장, 1980년대.]
  
 
한강과 사람이 관계 맺은 오래된 기억
   "이 땅은 원래 백제 초기의 토성이었던 몽촌토성이 있던 자리입니다. 곁에 있는 풍납토성과 하나의 지역을 이룹니다. 풍납토성이 북성(北城)이라면 몽촌토성은 남쪽에 있다 해서 남성(南城)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앞을 흘러서 한강으로 들어가는 천이 성내천(城內川)이에요. 토성 안을 흐르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성내천은 남한산성에서 발원하기 때문에, 남한산과 더불어 하나의 맥을 이루는 산수(山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예로부터 도읍이 물가에 자리잡곤 하는데, 기록에 나오는 백제 초기의 수도 위례성으로 보는 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고대의 토성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몽촌토성은 강을 낀 성이라는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 성내천의 물을 끌어들여서 해자를 만들어요. 우리의 고유한 자연을 대하는 개념이 산과 물[산수]에 관한 것이라면, 몽촌토성은 한강 가에 있는 하나의 장소로서 인공적인 요소[성벽, 해자 등]를 도입하면서도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해냈습니다. 풍납토성은 나중에 발굴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1925년의 을축대홍수 때 쓸려나면서 발견이 되었지만 방치해 두었더니, 우물우물하는 사이에 80년대에 그 안에 아파트들이 빽빽히 지어져서, 바깥의 성벽의 흔적과 기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의문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기가 백제 초기의 중요 유적임은 틀림없고, 그 유적 위에 공원을 조성하게 됩니다. 그 공원은 80년대 국제 경기를 치르는 동안 중요한 몫을 수행했고, 그 후 송파구 일대 주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녹지 공간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소마미술관에서 본 몽촌토성의 능선. 풍납토성의 발굴 전에는 몽촌토성이 위례성이고, 풍납토성은 몽촌토성을 방호하는 사성으로 보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었다. 1990년대에 풍납토성 안의 아파트 재건축 공사장에서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고고학계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지금은 풍납토성을 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강력하다.]  
  
 
한강의 기적 또는 기억을 지운 기념비
   "1988년에 올림픽 경기 당시에 《세계현대미술제》라는 것을 개최했습니다. 문화 예술 축전 행사의 일환으로, 야외 조각전을 기획을 하고 심포지엄도 하고, 세계 여러 조각가들을 초청해서 조각을 제작하게 합니다. 야외 조각 정원으로서 시민들에게 많은 훌륭한 예술 작품을 보여 주었는데, 십수 년 지나면서 일부 조각들이 조금씩 훼손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실내 전시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백남준(白南準, 1932~2006년) 선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무렵이었습니다. 공단 이사장으로 있던 분이 백남준 선생을 직접 만나서 올림픽을 모티프로 한 작품을 영구 전시하기로 하고 의뢰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죠. 운영위원을 맡은 분들이 야외 조각으로 이름난 유럽의 미술관, 이를테면 코펜하겐의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이라든지 벨기에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Kroller-Muller Museum) 등을 둘러 보고 그와 유사한 성격의 미술관을 짓기로 결정합니다. 지명 공모전을 통해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주로 생각했던 것은 이곳이 일반적인 미술관이 아니고 야외 조각 정원이 있는 미술관이라는 특성이었습니다. 현장성, 이른바 ’사이트 스페시픽(Site Specific)’이라는 겁니다만, 과거에 조각가들이 현장에서 만들었듯이 나도 땅의 특정한 조건을 되도록 고려하고 이에 대응하는 미술관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소마미술관, 서쪽에서 본 모습. 거의 땅과 한 덩어리인 듯 납작하게 붙은 형상은 몽촌토성과 그 해자라는, 이 땅의 가장 오랜 유적에 대한 경의다. 사진 김재경.]
  
 
하나의 장소, 두 개의 시간
   "즉, 이 장소에는 올림픽 공원이라는 이름에 새겨져 있듯 올림픽의 시간성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된 몽촌토성도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을 합쳐서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건축, 혹은 외부 공간을 생각했습니다. 기존의 다른 미술관에 비해서 건물의 경계가 땅이 분명히 나눠지지 않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건축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년)가 초기에 했던 컨트리하우스 벽돌집(Brick Country House, 1923년)과 유사하게 공간이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그런 형태라고 설명합니다. 토성의 구릉과 대비되는 아주 편편하게 깔려 있는 건축이죠. 그런데 설계가 끝난 후에 미술관을 기획하고 백남준 선생 작품도 받아 온 이사장이 갑자기 딴 데로 발령을 받아요. 그리고 나서부터는 미술관을 해서 돈이 얼마나 남는가만 따지면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체육진흥공단은 경기장을 이용해서 갖가지 돈을 버는 사업들을 하고 있었고, 미술관도 돈을 버는 곳으로 생각한 겁니다. 이 건물은 시공으로는 품질이 굉장히 낮습니다. 그러면서 체육진흥공단과 사이도 나빠지고 한참동안 내가 설계했다고 아예 발표조차 하지 않았어요."
 
[미스 반 데어 로에, 컨트리하우스 벽돌집 평면, 1922년, MoMA 소장. 
엘 리시츠키의 <프로운>을 위시한 러시아 구성주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평면이다.]
  
 
숨겼던 작품의 부활
   "한 1년쯤 지났을까, 조각가들이 전화를 해요. 기획전 작가로 초대를 받아 와 보니 이 미술관 전시장이 이렇게 좋을 수 없다는 거예요. 공간이 아니라 자기들 작품이 잘 드러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미술관은 작품이 돋보여야 한다는 것은 처음 계획할 때부터 생각이기도 했지만, 이 건물이 자체 완결성이 떨어지고 허술해 보여서 그런지… 여러 작가들마다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나중에야 조금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고쳐 나갔습니다. 미술관을 지을 때까지는 큐레이터도 없었는데, 후에 좋은 기획자가 와서 이름도 소마 미술관으로 바꾸고 좋은 전시를 많이 유치했습니다. 지금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습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카페입니다. 미술관 앞의 가장 좋은 자리에 큼직한 카페를 두고, 뮤지엄 숍도 좋은 자리에 두었어요. 뮤지엄 숍은 처음 개관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분이 운영하고 있는데, 고군분투하면서 미술관을 열심히 알리고 있어요. 그런 저런, 사람들의 노력들이 합쳐져서 이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좋아하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소마 미술관 내부. 조각 정원의 풍경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다. 
미술관답지 않게 전시장 안으로 햇빛이 많이 들어오는 이 곳에서 미술 감상은 
외부로부터의 초시간적 단절이 아니라 계절과 시간에 반응하는 흐름이 된다.]
  
 
미술관을 가십니까, 카페를 가십니까
   "그래서 미술관 이야기를 좀 하자면, 20세기 말부터 전세계적으로 미술관들이 많이 지어지게 됩니다. 우리 나라도 그 시류를 탔고요. 그러면서 미술관이라는 것의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과거에 우리가 흔히 연상하던 것은 미술 박물관으로, 파리의 루브르나 대영 박물관, 뉴욕의 구겐하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역마다 미술관이 생기면서 ’그 지역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슈투트가르트 미술관(Neue Staatsgalarie Stuttgart)을 보면, 제임스 스털링(James Stirling, 1926~1992년)이 설계한 건물인데, 그 건축이 조형적으로는 별로 내 마음에는 안 들어요. 이른바 포스트모던 양식으로, 키치 요소를 잡다하게 등장시켰죠. 중요한 것은 도시 속에 하나의 ’장소’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의 높고 낮은 두 개의 길을 연결해 냈거든요. 설사 미술관을 안 가는 사람도 일상적으로 가깝게 지나다니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술관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냐. 옛날처럼 귀족이나 고귀한 상류 사회를 위한 게 아니잖아요. 제임스 스털링이 그런 이야기를 했죠, ’청바지를 입고 들어갈 수 있는 미술관.’ 화이트큐브로 대변되던 미술관이 시민들을 위한 장소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되는 데는, 퐁피두 센터라든가 여러 좋은 미술관들이 큰 몫을 했습니다. 퐁피두 센터는 거대한 볼륨인 데다 전혀 새로운 종류의 전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주변의 지형과 사람들을 세심하게 고려해 기분 좋은 관계를 만듭니다. 소마미술관의 카페에 하필이면 프렌차이즈 체인이 들어오긴 했지만, 그걸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미술관과 사람들이 연결됩니다. 아무리 조각 미술관이라고 해도 미술관이라는 곳은 내부 공간이 밖으로 열리는 데는 한계가 있는 건물입니다. 하지만 카페는 주변으로 활짝 개방될 수 있고, 마침 그 자리는 토성의 실루엣과 해자라는, 몽촌토성의 특징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죠."
[제임스 스털링, 마이클 윌포드, 슈투트가르트 국립 미술관 모형. 
뒤쪽의 높은 땅이 오른쪽의 램프, 가운데 원형 벽을 따라 난 
사선의 계단으로 앞의 낮은 땅과 이어진다. ⓒ Neue Staatsgalarie Stuttgart.]
  
 
땅과 하나가 되는 건축
   "제가 설계했던 다른 미술관들, 예를 들어 광주의 의재미술관, 또는 홍성 이응노의 집은 특정한 예술가의 생애와 관계된 장소에 들어선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마는 그런 미술관은 아닙니다. 특징적인 컬렉션이 유명하다면 거기에 집중해 설계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전시 기획자의 의도에 따라 그 때 그 때 다른 공간으로 바뀔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우선 여섯 개의 전시장이 있는데 전부 모양과 크기, 천장의 높이가 달라요. 채광 면적도 다릅니다. 야외 조각 정원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각 전시장이 외부 공간과 관계를 맺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땅의 의미를 건물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미술관은 그저 어떤 전시장이 아니라 몽촌토성과 하나의 집합체인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미술관은 동선이 굉장히 길어요. 하나의 입구로 들어가면 중심에 로비가 있는 구조가 아니라 한 바퀴를 돌아 다음 전시장으로 가고, 다시 경사로를 건너거나 바깥을 나갔다가 들어와야 하기도 하고요. 아주 다양한 동선을 만들고 선택할 수 있게 해서 위계 질서를 흐트리려고 했습니다. 계절마다, 시간마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달라지고, 그 사이사이에 조각들이 배치되면서, 집과 바깥이 태극처럼 하나로 엉켜 들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소마미술관의 램프. 지하로 꺼지게 함으로써 이 집은 땅 속에 묻힌 듯 느껴지기도 한다. 
땅과 한 덩어리가 되려는, 건축의 낮고도 낮은 구애. 사진 김재경.]
  
 
작품과 하나가 되는 건축
   "제일 높은 곳에 백남준 홀이 있고 그 안에 <금관>과 <메가트론>이라는 거대한 비디오 영상이 상설 전시되어 있습니다. 백남준 선생에게 도면에 대한 커멘트를 받아서 만든 홀인데 거기를 올라가려면, 밖에 나갔다가 들어가는 것처럼 가야 합니다. 마치 한옥 집 밖에 있는 별채처럼요. 나중에 용인에 백남준 아트센터가 생기면서 그 중요성이 다소 퇴색했지만, 올림픽을 치른 장소임을 고려해서 백남준 선생이 만든 비디오 아트이기 때문에, 이 작품과 건물이 일체를 이루게 했습니다. 올림픽 공원 곳곳에 여러 좋은 조각이 있습니다만, 특히 대니 카라반((Dani Karavan, 1930년~ )의 <빛의 진로(Way of Light)>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페인의 벤야민 기념비를 만든 이스라엘 조각가이자 건축가예요. 올림픽공원에 설치한 작품도 건축적 장치의 성격을 띠는데, ’방향’을 다룬 작품입니다. 한국에 와서 봤더니 사람들이 향에 대해서 아주 각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는 데 착안했다고 해요. 그 작품과 이 미술관 건축의 방향이 맞춰져 있습니다. 조각은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지만 한번 같이 보시기 바랍니다. 올림픽공원의 여러 작품 중에 ’사이트 스페시픽’에 가장 충실한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마 미술관의 백남준 아트홀로 통하는 램프. 
백남준 아트홀은 미술관에서 가장 높은 곳이지만 14미터에 불과하다. 
아래의 물은 몽촌토성의 해자, 성내천의 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사진 김재경.]
  
 
스스로를 드러내는 형상, 감추는 형상
   "올림픽공원은 아주 조형적인 폼(form)을 빚었어요. 성의 구릉으로 탁 펼쳐진 잔디밭을 오르락내리락 산책하죠. 그 공원의 가장 중심축에 김중업 선생이 설계한 평화의 문이 우뚝 서 있고, 그 너머에 남한산성을 향해서 방사상의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가 펼쳐집니다. 성내천과 남한산성 사이의 땅에 80년대가 올림픽이라는 사건을 기념하면서 그려 낸 거대한 상징입니다. 아, 드라마틱하지요. 그런데 이 형상이 너무나 강해서 보기에 따라서는 남한산성과 몽촌토성을 짓누르는 듯도 합니다. 그 오래된 토성의 구릉이 마치 공원의 폼을 위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어떤 특정한 땅에서는, 의도적으로 형상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인간이 무언가를 만들 때 형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체 완결을 시키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결국은 또 하나의 폼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든 흐트리려고… 무심한 듯… 어쩌면 목표는 미술관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요. 시민들이 더 오래 쉬고, 더 많이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소마는 끊임없는 길, 길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아, 그래, 여기가 몽촌토성이었지 하고 발견하게 될 때까지… 그것이 우리가 몽촌토성을 압도하지 않는 자세라고 보았습니다."

[맞은편에서 내려다본 올림픽 공원. 앞의 왼쪽에 소마 미술관, 뒤 오른쪽의 황토색 건물이 새로 들어선 한성백제박물관. 다섯 경기장의 지붕 너머 그 자체로 강력한 기념 조각의 성격을 띠는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 단지가 펼쳐지고 멀리 남한산이 둘러쳐진다. 사진 모도건축.]
  
 
다시, 한강과 사람의 역사
   "소마미술관 말고도 한강 주변에 미술관, 박물관을 몇 개 더 응모했어요. 다 떨어졌지만, 그 중에 각별히 안타까운 것이 뚝섬 수도 박물관입니다. 이 곳은 우리 나라 최초로 수돗물을 공급하던 곳으로, 규모는 아주 작지만 100년 동안 한강의 역사를 응축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장소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가지고 풀어내려고 한 것이 오히려 읽히지 않았나 봐요. 소마미술관이 있는 자리가 이천 년 전의 토성,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장소라면, 뚝섬은 조선의 마지막 포구이자 처음으로 근대 시설들이 들어온 곳입니다. 조금만 더듬으면 기억할 수 있고 지금의 삶과 연결된 장면들입니다. 충분히 한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드러낼 수 있는 프로젝트였는데요. 거기에도 유적이 있어요. 당시의 수도 펌프 시설과 아주 큰 여과 장치가 지금도 묻혀 있어요. 언젠가는 열어서 다뤄 봤으면 좋겠어요. 당선안은 그런 배경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은 안이었고, 손을 안 댄 게 다행이긴 한데…."

[소마미술관 외부. 사진 김재경.]
  
 
2015년, 서울의 미술관
   "우선 도심에 현대 미술관이 생겼다는 것이 반가운 거예요.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에 있다는 게 늘 불편하고 더구나 동물원하고 랜드 사이에 끼어서 코끼리 열차를 타고 가야 되는 미술관에 대한 자괴감이 있었는데 도시를 어슬렁거리면서 갈 수 있는 곳에 현대 미술관이 있다, 좋은 사건이죠. 그것이 다른 옛날 쓰였던 건물을 고쳐서 활용했다는 점도 좋은 기획입니다. 미술관 자체가 내 마음에 드냐 안 드냐, 그건 다음 문제죠. 거기에 이어져서 미 대사관 숙소로 썼던 송현동 땅이 어떻게든지 좋은 문화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랍니다. 그 앞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아직 성격을 잘 모르겠어요. 서울역사박물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까지 이어지는 포스트가 될 만한 자리인데요. 어쨌든 그 일대가 고궁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문화 공간 사이를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지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간들이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광화문 광장과 잘 구성이 되어야 할 텐데요. 기존에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들, 국립극장,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예술의전당,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모두 접근성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문화 정책이 그렇게 갔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선택된 사람들만 작정을 해야 갈 수 있는 곳으로 보이게 만들었지요. 하지만 작은 규모의 공공적인 문화 공간이 집 근처에 훨씬 많이 생겨야 합니다. 근대의 소산 가운데 다른 것도 우리 손으로 직접 세우고 가져 본 경험이 없지만 미술관이라는 것도 역사적 경험이 별로 없는 공간이 아닌가 해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미술을 매개로 모이고 릴렉스할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미술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실은 나만 해도 미술관 자주 못 갑니다. 시간이 안 나니까요."
   [소마미술관은 2004년에 연면적 10,191㎡, 전시 공간 949㎡의 2층 건물로 개관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 콤플렉스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국고 1229억 원과 민자 3173억 원을 들여 올림픽 공원을 컨벤션, 스포츠 테마파크, 호텔, 쇼핑 시설이 합쳐진 관광 시설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아래 사진) 올림픽을 치르는 갖가지 스포츠 행정 단체들이 모조리 이 곳에 입주하게 된단다. 소마 미술관도 "조금 더" 늘리기로 했다. 전시 공간 3,731㎡, 지금의 네 배다. 몽촌토성을 향해 엎드려 조아릴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새 미술관은 2016년 개관 예정이다. 올봄에 부러 찾아 기억해야 할지 모르는 소마미술관의 풍경, 어쩌면 우리의 처음이고 마지막일지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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