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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3-06-14 21:42:00
조회: 5,771  
제목 [ways of seeing] 人文_인간이 그리는 무늬
 

본문

 
 
 
 
 
 
최진석 교수의 '현대철학자, 노자' 제1강중 (EBS 인문학 특강. 2013. 02.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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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지금,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는데
그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그룹은 기업인들이다.
 
상인들한테는 다른 직업군에게 없는 특징이 있다.
 
상인들은 자기가 한 의사 결정이 자기의 승패를 좌우한다.
다른 직업에 없는 특징이다.
 
그래서 상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예민한 감각이 있다.
생과 사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예민함이 점점 마모된다.
 
그래서, 월급을 꼬박꼬박 받는 사람중에서 창의적인 사람이 나오기 힘들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고도의 예민함을 유지하기 때문에
감각이 살아있다.
 
기업의 CEO들은 의사결정이 상당히 빠르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딱 보면 안다.
이 세상 일은 거의 다 딱 보면 알아야된다.
 
딱 봐서 모르는 일은 평생 모른다.
딱 봐서 아닌데 선택한 것은 평생 고달프다.
 
딱 보면 아는 능력, 이것을 통찰이라 칭한다.
 
이 통찰은 지식과 감각과 욕망과 모호함, 두려움
이런 모든 것들이 이 사람 안에서 한꺼번에 폭발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이다.
 
상인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
 
왜?
경계에 있기 때문에.
 
상인들은 왜 이 경계에 서서, 딱 보는 안목으로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가?
 
인문학에 투자해야 돈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인문학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기업인들, 상인들이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가?
 
여기에 우리 사회의 의미가 들어있다.
 
어느 사회이든지 사회의 초기 단계에는 법학,정치학이 중심 학문이다.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신문방송학이 중심 기능을 한다.
좀 더 사회가 발전하면 철학,심리학 등 인문학이 중심 기능을 한다.
이 사회가 조금 더 발전하면 고고학, 인류학이 중심 기능을 한다.
 
고고학, 인류학이 발달한 나라들은 고금을 통틀어서 인간을 하나의 틀로 해석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고고학이 발달한 나라들은 한번쯤 제국을 꿈꿨던 나라들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못 하느냐의 경계에 서 있다.
학문적 틀로 보면, 인문학이 중심기능을 하는 시대로 진입하느냐 못 하느냐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인문학은 인간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려 준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정체를 알려준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인문학을 통해 새로운 질적 도약을 이루지 못하면
우리의 발전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상인들은 감각적으로 알고 있다.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화두는 상상력과 창의성이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필요한 이유는,
지금 우리의 경제,정치,교육 구조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우리의 발전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때문이다.
 
왜 기업인들은 이것을 알고 실천하는가?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하지 않아도 월급이 나온다.
교수들, 이야기만 하고 자신이 하지 않아도 월급이 나온다.
정치인, 아무 소리나 해도 월급이 나온다.
 
기업인들이 인문학을 필요로하는 이유는,
인문학을 통해서 더 고급스러워지겠다는 뜻이 아니라
생존과 관련된 것이다.
 
인문학은 생존이다.

인문학이 중심 기능을 하는 사회로 진입한다는 것은
대답하는 인재보다 질문하는 인재의 비율을 높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집단적 틀 안에서 자기를 해석하는 사람보다,
집단을 이겨내고 자기의 주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을 높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여기에 인문학이 기능을 할 수 있다.
 
인문학은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질적인 비약과 관련된 문제이며, 한국사회의 발전,생존과 관련된 문제다.
 
인문학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대해서 알게 해 주는 학문이다.
학이다, 라고 정해지면 매우 폐쇄적이 된다.
학은 배운다는 말. 모방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학으로 정해지는 순간, 그 학은 모방해야되는 대상으로 정지해 버린다.
 
학문은 학이 어떤 활동 속에서 정지된 형태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동작속에서 이루어져 있는가를 짐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그 활동을 할 수 있어야 된다.
 
활동할 수 없는 인문학적 학습은 오히려 제한하고 숨통을 조인다.
 
인문적 활동과 통찰을 할 수 있는 자기만의 감각을 확보해야 한다.
 
결국, 자기가 인문적이 되어야 한다.
 
질문은 내가 하는 것이다.
인문학을 내 인문적 통찰의 힘으로 삼겠다는 사람은,
우리에서 나로 돌아가야 된다.
 
우리에서 나로 돌아가지 않고,
항상 내가 우리로 존재하는 사람한테는
통찰의 힘이 나오지 않는다.
 
통찰은 분석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과 힘의 문제이다.
 
1999년 타임지의 기사로,
동양인들의 마음에는 맞는 정답이 언제나 존재하고 이는 책이나 권위자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새겨져 있다.
 
아시아인들은 정답을 찾기만 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을 하자.
내일 오후 3시부터 생각을 하자, 라고 결심한다고 해서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주체의 힘, 동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생각할 수 없는가?
우리 머리속에는 너무 강한 신념과 이념과 가치관과 지적체계가 있다.
 
우리에게는 항상 외부에 있는 것이 진리였다.
 
기업인들은 인문적 통찰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다.
주체의 힘이 있다.
왜 주체의 힘이 있는가?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경계의 부단한 중첩, 이것이 흐름이다.
 
이 흐름속에 자기를 맡긴다는 것이다.
자기를 지배하는 어떤 신념과 이념에서도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이다.
 
통찰을 하는 사람, 리더는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경계에 있을 때는 두렵다.
경계에 있을 때는 모호하다.
경계에 있을 때는 불안하다.
 
이 불안과 모호함
이것을 분명히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분명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견디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 경계에 서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면 한쪽을 선택하게 된다.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이 사람은 딱 여기까지.
 
경계에 서 있을 때 있는 모호함을 분명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순간.
거기까지.
 
모호함, 두려움, 불안함.
이것을 견딜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그사람이 인문적 통찰로 나아갈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갈등과 협소함, 제한은 명료함에 있다.
어느 한쪽의 명료함을 선택하는 순간. 
그 한쪽에서만 살게 된다.
 
우리가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한쪽에 있기 때문이다.
한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체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체계를 숭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자유롭지 않은가.
지식과 믿음을 진리로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론과 지식, 관념, 이념을 머리 위에 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적 활동을 한다는 것은
머리에 이고 있던 것을 내려서,
자기가 밟고 우뚝 서는 것이다.
 
그래서 인문적 창의성은 용기와 관련된다.
 
경계에 서서 나오는 두렴움을 견디는 것도 용기.
경계에 서는 모호함을 견디는 것도 용기.
경계에서 있을 때 오는 불안함을 견디는 것도 용기다.
 
결국 인문학은,
너를 가두고 있던 우리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가두고 있는 우리일 뿐이다.
결국은, 너 자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에 행복과 자유와 통찰이 있다.
 
2500년전에 장자가 이 이야기를 가장 분명하게 하였다.
장자 이전에 노자가 있었다.
 
"너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나 이념은 기준이다.
그 기준은 억지로 만들어서 개념적으로 구조화한 것일 뿐이다.
그 기준이 행사되는 한, 사회는 혹은 너는 구분될 것이다.
구분된 다음에는 한쪽을 배제할 것이다.
배제한 다음에는 한쪽을 억압할 것이다.
기준을 갖는 한 당신은
한쪽에 설 수밖에 없다.
한쪽에 서는 순간
당신의 자발성, 자율성은 유린된다.
이 기준과 이념과 신념을 이탈해서
오직 너의 자발성으로 돌아가서
이 자발성 속에서 너의 삶을 향유하라.
이러한 자발적 개인들이 모인 사회가 강하다."
 
노자가 이미 현대를 철저하게 준비해 놓은 철학자임을 알 수 있다.